학창시절의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잠 만큼은 잘 챙기는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날 때까지 밤 10시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사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기숙사 학교였는데, 혈기왕성한 녀석들은 점호가 끝나기 무섭게 자습실로 우르르 내려갔다. 그런 환경에서 홀로 일찍 잠자리에 든다는 건 큰 결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나는 잠을 충분히 자는 게 더 중요하다는 믿음으로 꿋꿋하게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 심장 수술을 한 몸으로 타지 생활을 하던 나를 버티게 해준 건 다름 아닌 잠이었다.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들어 푹 자고 나면 다음 날 머리가 맑았고, 스트레스도 사라졌으며, 종일 최적의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머릿속이 맑으니 조금만 공부해도 자습실에서 밤늦게 공부하는 아이들에 비해 성적도 쭉쭉 올라갔다. 그걸 경험적으로 터득한 나는 잠자는 시간만큼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그런 원칙도 많이 무뎌졌다. 해야 할 일이 많아졌고 하고 싶은 일은 더 많아졌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부족한 공부를 메꾸려고 잠을 줄였고, 의대에 다니는 동안에는 악명높은 의과대학의 학습량을 따라가기 위해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길 밥 먹듯 했다. 인턴, 레지던트 시절은 굳이 더 언급하지 않아도 되지 싶다.
그때마다 결국 잠은 자기의 몫으로 마련된 시간을 조금씩 내어주었다. 그러다가 결국 잠은 깨어있는 시간을 위해 언제든 줄여야만 하고 줄일 수 있는 부수적이고 종속적인 대상이 되었다. 잠에 인격이 있다면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네."라며 투덜거릴 것만 같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잠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믿는다'는 건 어떤 지식에 충분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잠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뿐 객관적인 증거는 미천했다. 나는 잠에 관한 한 장님 코끼리 만지듯 단편적 지식의 조각들을 접했을 뿐이다.
그것이 내가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주저 없이 읽기 시작한 이유다. 책의 제목에 대한 답이 책 속에 담겨 있다면, 다시 말해 잠이 중요하다는 걸 확실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담겨 있다면, 내가 다시 잠을 다른 일보다 우선순위에 두는 데 강력한 동기부여가 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이 책의 저자 매슈 워커Matthew Walker는 오늘날 전 세계에 만연한 수면 부족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신경 과학자이자 수면 전문가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충분한 수면이 어떻게 우리를 더 지적이고, 건강하며, 무엇보다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내가 책을 읽는 동안 특히 인상적으로 느꼈던 내용 몇 가지를 여기에 소개한다. 저자는 잠의 두 가지 단계인 비렘Non-REM수면과 렘REM수면의 특성을 비교하며 그 중요성을 설명한다. 렘수면은 잠의 전반부에 주로 나타나는데 흔히 깊은 수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에 반해 비렘수면은 주로 후반부에 많아지는데, 꿈을 동반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 두 가지 수면은 '학습'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고 한다.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 무언가를 배우면 비렘수면은 이것들 가운데 의미 있는 것을 뇌 속에 장기 저장하도록 한다. 이를 전문 용어로 '기억 응고화'라고 한다. 한편, 렘수면은 깨어있는 동안 받아들인 정보를 직관적으로 재구성하여 의미를 부여한다고 한다. 쉽게 말해 비렘수면은 기억력, 렘수면은 통찰력을 빚어내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학생들이 겪고 있는 수면 부족 문제를 짚는다. 아이들을 아침 일찍 학교에 보내고, 밤 늦게까지 밀린 공부를 하게 하는 것은 학습이라는 본질적인 목표를 생각했을 때 무척 잘못된 방법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길 원한다면 더 많은 수면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어서 저자는 인간이 살아가며 겪게 되는 여러 손상과 질병을 이겨내고 '건강'을 회복하는 데 수면이 무척 중요하다는 점을 밝힌다. 충분한 잠이 알츠하이머병Alzheimer's disease, 우울증, 심혈관계 질환 등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 되는 질병들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저자는 렘수면 중에 뇌 속에서 베타 아밀로이드β-amyloid가 제거되는 것을 밝힌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베타 아밀로이드는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으로 알려진 물질이다. 이는 곧 충분한 수면이 치매를 예방하고, 반대로 수면 부족이 치매를 촉발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저자는 수면 박탈이 인체에 치명적이라는 점도 보여준다. 수면 박탈이 죽음으로 이어진 개별적인 사례를 소개할 뿐 아니라, 매년 한 차례 서머 타임Summer time으로 수면 시간이 단 1시간 줄어들 때 통계상 사망률이 급격히 올라간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저자는 충분한 수면으로 피로를 해소하고 몸과 마음을 제대로 충전한다면 우리 사회의 '안전'과 관련한 여러 난제가 개선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충분한 수면의 보장은 도로 위의 졸음운전이나 산업 현장의 안전사고를 미리 방지하고 더 나아가 인명피해로 이어지는 걸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들은 주로 숫자로 이루어진 통계로 다루어지기 마련이지만, 당사자나 그 가족들에게는 평생 고통으로 남을 수 있는 큰 사건이다. 저자의 지적이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다.
저자는 의료진들이 겪고 있는 수면 부족 문제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낸다. 사실 인턴, 레지던트들이 놓인 혹독한 수련 환경을 둘러싼 우려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라면 그 정도는 마땅히 버텨내야 할 과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젊은 의사들이 제대로 잠도 못 자면서 수련을 받아야 유능한 의사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오늘날 당연시되는 혹독한 의사 수련 환경의 유래에 얽힌 충격적인 사실을 밝힌다. 인턴에서 레지던트로 이어지는 병원의 수련 체계는 19세기 말 존스 홉킨스 병원Johns Hopkins Hospital의 전설적인 외과 의사 윌리엄 스튜어트 핼스테드William Stewart Halsted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체력과 정신을 의사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조건이라고 믿었고 그 자신도 그대로 실천했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밝혀지기로 그는 심각한 코카인cocaine 중독자였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의사 수련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도 코카인 중독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우리는 오래전에 살았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어떤 마약 중독자가 왜곡된 관점으로 고안한 의사 양성 체계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단지 그가 권위 있는 의사였다는 이유로 말이다.
혹사당한 의사들이 잠이 부족한 탓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수술장에서 최선의 술기를 발휘하지 못한 탓에 환자와 그 보호자들에게 해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움을 넘어 아찔함이 느껴진다. '유능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잠을 견디며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하루빨리 폐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종종 인간다운 삶에 관해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저자가 이 책에서 거듭해서 강조하는 ‘푹 잔 뒤 개운한 느낌으로 맞이하는 아침’이야 말로 인간적인 삶의 중요한 조건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요즘 아무리 늦어도 10시에는 자려고 한다. 밤 10시에 잠들어서 오전 6시 30분쯤 일어나면 스마트밴드에 8시간 남짓 정도의 수면 시간이 기록된다. 그런 날은 그 이전에 경험 못했던 맑고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부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런 기분을 느껴보았으면 한다.
원문: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 | 신승건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