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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가족
12화
또 다른 엄마... 장녀
엄마의 데칼코마니
by
신수현
Jun 16. 2025
우리는 일곱 형제였다.
성경에서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 7이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늘 뭔가 부족하고 불안정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짝수였다면 서로의 편이 되어주며 의지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 시절, 부모님에게는 그 일곱이라는 숫자가 완벽한 가족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다행히 오빠들과 여동생들의 나이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우리는 각자의 역할 속에서 균형을 잡고 살았다.
오빠들은 함께 떠들며 놀았고, 넷의 딸들은 함께 어울리거나 둘씩 짝을 지어 어린 동생들을 돌보았다.
마치 잘 짜인 연극처럼, 혹은 서툰 인턴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하며 미션을 수행하듯 그렇게 지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큰언니의 흑백 돌사진이 있었다.
앨범의 첫 장을 장식하던 그 사진 속 큰언니는 여전히 아련하다.
그 이후 동생들에게는 백일사진도, 돌사진도 없었다.
집이 너무 작아 사진으로 도배할 공간조차 없었을까, 아니면 힘든 삶 속에서 아버지의 마음이 변했을까? 하지만 그 이유는 어린 나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사진이 없어도 우리는 함께 자라났으니까.
가족계획 밖의 삶, 인턴처럼 살아낸 부모님
아버지와 엄마는 시대의 격류 속에서 정말 열심히 사셨다.
정부의 '가족계획' 구호는 그저 구호에 불과했다.
일곱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아버지는 마시고 싶은 술도, 만나고 싶은 친구도 멀리하셨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으로서의 삶, '자신'으로서의 자유는 사치였다.
오로지 '누군가의 아내'이자 '누군가의 엄마'로만 존재해야 했다.
그 속에서 엄마는 가장 낮은 자세로 모든 것을 감내했다.
우리는 부모님의 희생 위에서 자라났다.
부모님은 마치 이 거대한 가족이라는 회사에 뼈를 묻는 '인턴'처럼,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고 또 일했다.
우리가 점심을 굶는 친구들을 자주 보던 시절이었으니, 그 사정에 비하면 우리 집은 조금이나마 여유가 있었던 듯했다.
굶지 않고 학교에 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시대였다.
고기를 먹는 날은 아버지 생신, 할머니 생신, 그리고 제삿날 같은 특별한 날에만 허락되는 호사였다.
형제들의 생일에는 겨우 닭볶음탕이 전부였지만, 그것도 우리에게는 진수성찬이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그 시절, 부모님의 등은 그렇게 굽어져 갔다.
또 다른 엄마, 장녀의 이름으로 산 언니의 삶
그중에서도 큰언니는 내게 또 다른 엄마였다.
엄마가 채 돌보지 못하는 빈자리를 언니가 채웠고,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언니의 헌신이 닿았다.
아버지가 눈시울을 붉히며 이야기하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입을 옷이 없어 여름에도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학교에 가야 했던 언니의 어린 시절. 동생들을 대신해 야단을 맞는 것도 언니의 몫이었고, 엄마 대신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것도 오롯이 언니의 몫이었다.
언니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교복도 갈아입지 못하고 부엌으로 향했고, 그 작은 어깨에 집안의 무게를 짊어졌다.
딸들 중에서도 큰언니는 유독 눈에 띄게 예뻤다. 나도 그렇듯, 언니 역시 하루빨리 집에서 독립하고 싶어 했다.
그 무렵, 언니는 공장에서 손가락이 끼어 산재 처리를 받느라 잠시 집에 내려왔다.
한창 직장 생활을 이어가야 할 시기에 겪은 사고였다.
그 이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언니는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결혼 준비를 하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사고가 언니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린 하나의 전환점이었을까? 집안의 기대와 압박 속에서 언니는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굽어진 데칼코마니, 반복되는 삶의 그림자
몇 번의 선을 본 후, 언니는 지금의 형부를 만났다.
인상은 선해 보였지만, 나이 드신 홀어머니를 모시는 외아들이었다.
언니가 결혼한 뒤로 나는 언니의 모습이 변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초롱하고 투명했던 눈빛이 서서히 사라졌고, 얼굴 한쪽이 마비되는가 하면, 종양이 생겨 얼굴 모양마저 많이 비틀어졌다.
곁에서 지켜보는 나조차도 고통스러웠는데, 정작 언니는 아무렇지 않은 듯 버텨냈다.
가끔 생각한다. 언니가 사회생활을 조금만 더 했더라면 어땠을까? 결혼을 하고서라도 경제생활을 이어갔더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조금 더 자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알게 되지 않았을까?
형부와 사별한 지는 벌써 십여 년이 훌쩍 넘었지만, 언니의 삶은 여전히 무언가에 얽매인 듯하다.
부부간의 문제는 내가 알 수 없지만, 언니가 결혼하던 그 시기에도 친정 식구를 만나는 것, 옷을 사는 것, 자기의 의사 표현을 하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그 시절을 견뎠던 언니가, 이제는 엄마의 삶을 고스란히 따라 사는 것이 너무나 안쓰럽다.
마치 엄마의 삶이 언니에게 그대로 '복사'된 것 같은 기분이다.
가족이란 어떤 이름인가? 수직, 수평, 그리고 자유를 향한 갈망
가족이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수직 관계인가? 아니면 수평 관계인가? 피로 맺어진 또 다른 가족이라기보다, 평생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운명 공동체인가?
'일찍 결혼하는 것이 엄마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길'이라는 그 시대 엄마들의 선입견 때문에, 언니는 일찍이 결혼의 길로 들어섰다.
지금은 형부 없이 사는 것이 더 편안한지, 아니면 여전히 고된지, 언니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언니들과 동생들과 밤새도록 수다를 떨며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 시절의 순수함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때만큼은 우리 모두 '인턴'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잠시나마 자유로웠을 테니까.
시댁귀신, 시댁에 말뚝 박기 등, 여성의 인생을 묶어버리는 그 시대의 암울한 관습을 지나, 이제는 조금 더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언니와 같은 삶이 더는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의 엄마와 또 다른 엄마였던 언니의 삶을 돌아보며, 나는 내 안의 그들이 남긴 그림자를 마주한다.
그리고 묻는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진정으로 모든 여성에게 자유와 자신만의 이름을 돌려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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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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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포기하는 시기
12
또 다른 엄마... 장녀
13
내 동생을 소개합니다.
14
나의 첫 스피치는 열두 살에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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