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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도 아들이다.

늙어버린 아버지도 할머니의 마음 여린 아들이었다.

by 신수현

아버지도 할머니의 어린 아들이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아버지 역시, 자신의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어릴 적 사별하신 뒤 재혼하셨다.

새 가정에는 전처의 자식들이 여럿 있었고, 아버지는 그중에서도 가장 어렸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는 딸을 낳으셨다.

아버지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고모였다.

그 고모와 큰오빠는 겨우 서너 살 차이였다.

어찌 보면 형제보다 더 가까운 또래, 그러나 다른 시대, 다른 결의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화초를 좋아했다.

식물에 말을 걸 듯, 정성을 다했다. 그래서 농사를 택하신 걸까?

유산을 상속받으며, ‘농사를 짓겠다’는 약속을 하셨다고 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분과의 약속.

많은 사람들은 그런 약속쯤은 무시하며 재산을 팔고 떠나버리지만, 아버지는 지키셨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그 약속을 안고 살아가셨다.

고지식하다고 해야 할까. 혹은 진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고모는 나이가 어려, 할머니의 각별한 손길 아래 자랐다.

큰오빠도 서울에서 어린 고모와 함께 학교를 다녔지만, 우리 가족 누구도 고모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

딸과 손주의 차별일까? 아니면, 남자라서 다정하게 다가가지 못했던 아버지를 닮은 성격 탓일까?


어쨌든 우리 형제는 고모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 없다.

그렇게 자식이 많은 집에서도, 아버지에게 외로움은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가끔 아버지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그럴 때는 어김없이,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시는 날이었다.


형제 중 누구도 할머니의 방문을 반기지 않았다.

할머니는 인상이 강하고, 목소리는 크고,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반대로 외할머니는 부드럽고 다정했지만,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셨기에 기억이 거의 없다.


할머니가 집에 오시면, 아버지는 정성껏 마중 나가셨다.

한 번 오시면 한 달 이상 머무르셨고, 좁은 집은 더 좁아졌다.

게다가 서울에서는 시골처럼 채소 하나조차 쉽게 구할 수 없었기에,

아버지는 엄마를 들볶았다.

“만둣국 끓여라.” “강정 만들어라.” “조청, 엿도 만들어라.”

그 모든 요구는 할머니를 위한 것이었지만, 힘들어지는 건 늘 엄마였다.


아버지와 고모, 할머니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어린 나에게도 선명하게 남았다.

그래서일까. 내 마음에 남은 할머니와 고모의 기억은, 언제나 엄마를 곤란하게 했던 그림자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그토록 신이 나셨을까?

할머니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아버지는 실실 웃으시며 “제가 잘못했어요” 하고 넘기셨다.

엄마 앞에서 할머니가 아버지를 야단치실 때면, 나는 속상했다.

그 뒤에 벌어질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 모든 시간이 아쉬운 듯 환하게 웃으셨다.


그제야 깨닫는다.

아버지도 누군가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어릴 적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광경이,

지금은 조금 이해된다.


내가 이제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고,

이젠 엄마와 함께 사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 역시 ‘엄마의 딸’이 되어버렸다.


엄마는 친구처럼 나에게 말을 걸고,

나는 어느새 엄마의 벗이 되어, 엄마의 하루를 들어준다.


삶은 직선이 아니다.

계속되는 것도, 멈추는 것도 아니다.

삶에는 반전이 있고, 역전이 있다.


힘없던 아이는 언젠가 청년이 되고,

힘센 아버지는 노년의 문턱에서 어린아이처럼 약해진다.


힘은 언제까지나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질 시간을 준비하며, 내려놓아야 할 순간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우리는, 힘없던 시절 누군가의 손에 기대었던 것처럼,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준비하고, 양보해야 한다.


사랑은 그렇게 순환된다.

만약 아버지가 오늘 살아계셨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셨을까?

예전처럼 큰소리로 호통치시는 분이 아니라,

오늘의 나처럼, 오늘의 엄마처럼,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여주셨을 것이다.

마치, 오늘 엄마와 통화하며 들은 그 다정한 목소리처럼.

하루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연약해졌을 부모님의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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