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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사용설명서
13화
함께하지 못해 불효자가 되었습니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
by
신수현
May 26. 2025
나는 아버지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내지는 않았습니다.
고3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께서 위중하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기적처럼 회복하셨습니다.
수술도 성공적이었고,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일어나셨죠.
그때, 엄마와 우리 가족은 이미 아버지의 죽음을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그 예상은 빗나갔고 아버지는 우리 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한 일이었지만, 현실은 다시 냉담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엄마와 다투셨고, 형제들은 각자의 가정을 꾸리면서도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기 일쑤였습니다.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이유로 우리는 아버지에게 상처가 되는 말도 쉽게 내뱉었습니다.
그 싸움은 엄마에게서 아들로, 아버지에게서 자녀로 대물림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해보지 않으면 몰랐을 농사일을, 부모에게 물려받은 논과 밭으로 이어가며, 무려 7형제를 키워낸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우리는 어느새 동등한 위치에서 대들기 시작했고, 마음속 불만을 고스란히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이란 단지 기쁨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가정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했던 날들은 모두 사랑이었지만, 그 안에는 상처와 후회, 참음과 고통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나는 그런 복잡한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나는 기도했습니다.
“
사랑을 알게 해 주세요
.” 어쩌면 그 말은 “나를 사랑해 주세요”라는 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이유를 “내가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기도 했습니다.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을 생각하며 기도했습니다.
잘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 가슴 깊숙이 밀려왔습니다.
심장이 조이는 듯 아프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으며, 입을 열어 말하고 싶은데 턱이 아프게 굳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기쁨이 아니라, 아픔이라는 것.
아버지도 어쩌면 당신의 작은 골방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눈물을 삼키고 계셨을 것입니다.
몸이 아파도, 기계처럼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멈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힘들어도, 이야기할 곳이 없어 꾹꾹 눌러 삼켰을 것입니다.
기계가 과부하에 걸리면 고장이 나듯, 아버지의 몸도 그렇게 무너졌을 것입니다.
쉴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에게 쉴 권리를 주지 못하고, 이야기하고 싶어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그런 고요한 고통을 너무 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졌을 때, 엄마는 연락이 끊긴 셋째 딸, 나를 애타게 찾으셨다고 했습니다.
"네 아버지가 네 소식을 그렇게 궁금해하시더라." "전화나 자주드려"
아버지가 생각나서 전화가 드릴때는 이미, 아버지와의 의사소통이 어려운... 아버지의 귀는 어두워지셨고, 나의 목소리도 잊혀져 가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때도, 마음은 있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마지막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단순합니다.
자녀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 순간만큼은 함께하고 싶은 것입니다.
몸이 아파도, 말을 못 해도, 그리움은 눈빛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새벽에 일어나셨습니다.
해가 뜨기도 전에 논으로 나가시고, 한낮 땡볕에도 논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셨습니다.
굳은살 박인 손, 검게 그을린 얼굴, 흙이 가득 묻은 옷. 늘어진 난닝구와 낡은 반바지, 그것이 아버지가 살아오신 패션이였습니다.
그런 모습이 너무 익숙해서 아버지의 고마움보다 나의 피곤함으로 아버지를 멀리했고, 가까운 사람에게 말 한마디 건네는 일조차 어렵게 여겼습니다.
나는 “수고하셨어요” 한마디를 하지 못했고, “고마워요”라는 말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사랑해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들이 다 마음속에만 쌓여 있다가, 아버지가 없는 지금에서야 나를 갉아먹습니다.
지금의 나에게 ‘시간’은 형벌입니다.
충분히 주어졌지만, 내가 그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간단한 말조차 미뤘고, 가장 소중한 시간을 외면했습니다.
영화 ‘
신과 함께’
에서 나오는 한 대사가 내게 날아와 박힌 적이 있습니다. “
나는 너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었다
.”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말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일지 몰라. 자주 얼굴 좀 보러 와라.” 하지만 나는 엄마의 말을 ‘괜한 걱정’이라 여겼고, 아버지는 쓰러졌다가 또다시 일어나셨기에 괜찮을 줄만 알았습니다.
정작 진짜 마지막은, 그렇게 조용히 찾아왔습니다.
이제야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이제야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마음을 글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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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사용설명서
11
어버이날 카네이션, 유통기한
12
아버지도 아들이다.
13
함께하지 못해 불효자가 되었습니다.
14
아버지가 낯설어질 때
15
아버지와 나... 둘만의 여행은 분명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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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기다리며 글을 씁니다. 멈춘듯, 흐르지 않는 어둠과 함께 ... 시간에 대한 후회, 반복되는 상처로 인해 글은 저의 치료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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