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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아버지가 낯설어질 때
아버지는 간절했고, 나는 느긋했다.
by
신수현
Jun 12. 2025
아버지가 낯설어질 때
시간은 누구에게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흐름은 각기 다르게 느껴진다.
정작 본인은 그 변화를 잘 인지하지 못하다가, 타인의 변화를 보고서야 “아, 나도 나이 들어가고 있구나” 하고 문득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마을회관 옆 중로당에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젊은 남자들이 모인 그곳에서 아버지는 용돈을 주셨고, 우리는 과자를 사 먹었다.
아버지는 결코 인색한 분이 아니셨다.
우리를 이해해 주셨고, ‘자식’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나에게 사춘기가 찾아왔듯, 아버지에게도 '어른의 사춘기
' 같은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가족에 대한 불만과 엄마에 대한 쌓인 감정들이 점점 말과 표정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덧니를 드러내며 웃던 아버지의 모습도 사라졌다.
나도 귀엽고 통통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 무표정한 얼굴로 혼나고 교실 밖으로 쫓겨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외모는 마음과 함께 조금씩 변해간다.
나도 모르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방향으로. 아버지의 얼굴도, 나의 얼굴도 그렇게 변해갔다.
그리고 그 변화는 우리 사이를 조금씩 멀어지게 했다.
어릴 적 무서웠던 아버지의 모습에 거리를 두었지만, 이제는 옆집 할아버지처럼 낯선 모습으로 변해가는 아버지에게도 나는 다시 거리를 두게 되었다.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의 부축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몸이 약해지고, 혼자서 지탱할 수 없는 날이. 그 시간이 정확히 언제일지 안다면, 지금보다 더 조심스럽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은 어리석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 시간이 언젠가 내게도 온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 내 차례는 아니라고 착각한다.
아버지는 어쩌면 그 시간을 알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집에 오지 않는 셋째 딸을 유난히 찾으셨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생신, 명절, 엄마의 생일에도 나는 가지 않았다.
동생에게 들은 이야기뿐이었다.
“아버지가 언니는 왜 안 오냐고 물어보셔.” 아버지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끼셨고, 나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아버지는 간절했고, 나는 느긋했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더 이상 크고 강한 목소리를 내지 않으셨다.
눈빛도, 말투도 약해지셨다.
어릴 적 바라던 ‘약해진 아버지’의 모습이 찾아왔지만, 나는 기쁘지 않았다.
아버지를 뵙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슬펐다.
무너지는 마음을 안고, ‘다음에 만나면 안아드려야지’, ‘손 한번 꼭 잡아드려야지’ 다짐하지만, 막상 마주하면 그 낯선 얼굴에 인사만 하고 돌아섰다.
시간은 너무 가혹하다.
누군가에게는 선물 같지만, 누군가에게는 후회만 남긴다.
나는 후회의 창살에 갇힌 사람이다.
가까운 사람이 낯설어진다면, 마음이 점점 멀어진다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서툴러도, 어색해도, 지금이 그럴 시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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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기다리며 글을 씁니다. 멈춘듯, 흐르지 않는 어둠과 함께 ... 시간에 대한 후회, 반복되는 상처로 인해 글은 저의 치료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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