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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씨네 세 며느리(3)

언제까지 퍼줘야 하나, 가엾고 불쌍한 우리 부모님

by 신수현

막내오빠의 아내, 즉 우리 가족의 세 번째 며느리는 외모는 여우처럼 매력적이었지만, 행동은 좀 엉뚱한 면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활발하고 친근한 성격으로 비쳤겠지만, 조용하고 과묵한 우리 집안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오빠는 새언니와 몇 달간 동거한 후 결혼을 결심했다.

같은 직장에서 만나 함께 살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얼마동안 지냈지만, 나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시골로 내려와야 했다.


큰오빠와 둘째 오빠가 분가한 후, 집은 잠시 조용했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막내오빠가 부모님을 모시겠다며 다시 내려온 것이다.

“얼마나 갈까?” “또 무슨 일로 부모님을 속상하게 할까?” 하는 걱정은 금세 현실이 되었다.

농사일은 생각보다 힘들었고, 외지에서 회사원으로 살다 돌아온 오빠가 시골 생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모든 며느리들이 그렇듯, 농사짓는 집안에 와서 농사일을 도우는 사람은 없었다. 그마저 식사하는 것이 전부인데도, 화가 나면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리고, 그 몫은 오로지 엄마 몫이 되었다.


우리는 아버지 앞에서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항상 조심스러웠지만, 새언니는 달랐다.

욱하는 성격에 눈치 없이 말하고, 화가 풀리면 아버지의 손을 덥석 잡으며 “아버지 화 푸세요~”라며 우리 가족이 하지 않는 행동으로 아버지를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이런 행동조차 우리와는 다르기에 아버지는 마지못해 웃어넘기셨다.


웬만해선 상처되는 말을 하지 않는 아버지이시지만, “너희 부모한테 그렇게 배웠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를 많이 내셨다.

새언니의 씀씀이는 항상 도를 넘었다.

부잣집 딸로 자란 것도 아닌데, 시골에서 피아노 학원을 보내겠다는 고집, 마이너스 통장에서 몰래 현금카드를 만들어 돈을 꺼내 쓰는 일까지. 통장을 찢어버리며 분노했던 오빠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부모님 앞에서도 부부싸움을 서슴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부모님의 한숨도 깊어졌다.

엄마는 그럼에도 이혼을 말렸다.

네 명의 아이들이 오빠와 새언니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오빠는 부모 곁을 떠나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새로운 삶은 오래가지 않았다.

위암 진단을 받았지만, 가장으로서 생활비 걱정 때문에, 아는 분을 통해 목수일을 배우며 지방을 떠돌았다.

생활비를 보내고, 공과금과 세금은 직접 처리했지만, 돌아오면 새언니는 또다시 신용카드를 만들어 카드빚을 쌓아두고 있었다.

어느 날엔 카드빚이 3천만 원이 되어 있었다.

가장 가슴 아픈 건, 보험 하나 없던 오빠의 현실이었다.

설계사 고모가 있음에도, 오빠는 암 보험조차 없었다.

수술과 치료, 입원 대기를 위한 고시원 생활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할아버지가 손주들을 위해 마련한 교육비도 중도 해약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암은 통증이 심해지기 전까지는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평소처럼 술을 마시고, 마음대로 먹으며 살았다.

하지만 병이 깊어지자 오빠는 아버지에게 애원했다. 이미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고, 수술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오빠는 살고 싶다고 울부짖었다.

아버지는 “논밭을 팔면 우린 뭘 먹고사냐”라고 했지만, 새언니는 “수술 안 시켜 죽였다”며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 말은 아버지의 발목을 오래도록 붙잡았다.


오빠가 세상을 떠난 후, 새언니는 37세였다.

막내 아이는 겨우 네 살, 아버지의 죽음을 알지도 못하는 철없는 나이였다.

40도 안된 나이에 과부가 된 언니가 불쌍했지만 오빠가 떠난 뒤에도 새언니는 여전히 부모님에게 의지했다.

아이들은 부모님에게 맡기고, 자신은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해 친정에서 생활했다.

새언니는 아버지에게 “친구가 그러는데 남편이 죽으면 시댁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살 임대아파트 하나는 해준다네요”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렸다.

가족들은 생각했다. 푼수인 줄 알았던 사람이 왜 이렇게 계산은 빠르고, 왜 이렇게 눈치는 없을까?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도, 듣지도 않는 사람 같았다.

아버지는 끝내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죽어가는 아들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는 자책, 결국 그 죄책감이 아버지를 병들게 했다.


오빠가 죽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새언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으며 장례식장에 왔다.

장례식장에서 흘린 눈물은 잠깐이었고, 그 뒤로는 상속 문제로 형제들을 괴롭혔다.


상속을 받았음에도, 계속 엄마를 찾아와 힘들게 했고, 식당 사업이 실패하자 상속받은 재산이 가압류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기도했다.

아버지가 지키려던 재산이 새언니의 손에 넘어가지 않기를. 그 재산은, 아버지의 마지막이었으니까. 엄마는 혼자였고, 점점 힘이 없어졌다.

결국 엄마의 재산도 다 나가고, 새언니는 발걸음을 끊었다. 손주들조차 아버지의 산소를 찾지 않았다.


부부는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정서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독립하지 못한 자식들이 여전히 부모에게 의존하는 현실. 부모는 언제까지 자식의 인생을 책임져야 할까. 아직도 답을 알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들면, “이제는 마지막이다”라고 되뇌며, 자식에게 자신을 던지는 엄마가, 가엾고 불쌍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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