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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씨네 세 며느리(2)

부모는 현금인출기가 아니다.

by 신수현

둘째 오빠는 연애를 통해 결혼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에 겁이 많고,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걸 힘들어해 아버지와 함께 농사일을 배우며 성장했다.


오빠의 결혼 소식이 들렸을 때, 나는 그다지 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 이유는 결혼할 언니의 여동생이 우리 언니와 동창이고, 남동생은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마치 인연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둘째 새언니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어린 나이에 미용 기술을 배우며 생계를 꾸려온 인물이었다.

그녀는 키가 크고 인상이 좋았지만,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신혼 초에는 아버지가 길가에 두고 있던 작은 집을 수리하는 동안 몇 달간 우리 집에서 함께 지냈다.


가까이서 지켜본 그들의 관계는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잦은 말다툼이 있었고, 언니는 동네 사람들의 머리를 다듬으며 가정을 꾸려갔다.


오빠는 축협에서 정육 일을 하며 매달 80만 원의 월급을 받았지만, 아버지는 "적은 돈이라도 월급을 받는 게 좋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오빠는 그 돈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며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그 시절, 시골에서는 가스를 집집마다 설치해 사용하는 곳이 많았다.

오빠는 가정용 가스를 공급하는 업체를 인수했고, 자격증이 필요하다는 조건에 따라 우리 집 막내오빠가 시험을 대신 보고 명의상 대표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업이란 단순한 열정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월급만으로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무작정 시작한 사업은 정말 위험한 선택이다.


자금도 부족했고, 처가의 도움도 받았던 것 같다.

결국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과 갈등은 두 사람의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했고, 어린 조카들이 있는 상황에서 이혼에 이르게 되었다.


게다가 그 무렵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셔 할머니 댁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새언니가 아버지께 유산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일은 할머니도 아셨고, 크게 분노하셨다.


이후 새언니가 아버지를 찾아와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대화를 시도했지만, 아버지는 "둘만의 문제"라며 단호히 거절하셨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갈라섰고, 이혼 후 어린 조카들은 결국 우리 부모님이 돌보셔야 했다.

부모에게 자식의 결혼은 또 다른 기쁨과 희망일 것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 그 자체가 부모에게는 큰 행복이자 위안이 된다.

하지만 그 행복이 무너지는 순간, 자식보다 더 깊이 상처받는 존재도 부모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피로 맺어진 형제 사이에도 갈등이 생기는데, 새로운 가족이 들어온 관계에서 오래도록 평화를 유지하길 바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나도 이제야 느낀다.


자식은 언제까지나 부모가 힘들 때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만, 부모의 자원에도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지금까지의 도움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받은 것보다 못 받은 것만 기억에 남게 된다.

나 역시 살아가는 것이 버겁다. 매달 빠져나가는 월세, 대출 이자, 보험료, 생활비는 숨이 막히고, 나이가 들수록 수입은 줄어들거나 불안정해지기 쉽다.

하지만 이런 생활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해야 하고, 벌지 못할 때 느껴지는 무게는 상상 이상이다.


결혼은 부모와의 독립선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자식은 부모가 아니라, 스스로 부모가 되어야 하며, 가정의 가장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의 어려움 앞에서 많은 이들이 가장이 아니라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다.


달팽이는 제 살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빈 껍데기만 남는다.

나에게 부모란 언제까지나 그렇게 퍼주기만 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나는 그 고마움을 너무 늦게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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