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동기인 훈이는 특이한 아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내신 성적은 별로였지만 수능은 항상 전교 1등이었고 경영학 복수 전공을 하고 있는 나에게 "경영학과는 어때요?", "그럼 회계사는 어때요?" 두 질문을 한지 불과 1년 만에 회계사가 되어 나타났으며, 가끔은 학생회관에서 머리통도 같이 염색되는 만 오천 원짜리 초록색 염색을 한 머리와 보색 조화를 이루는 치파오를 입고 나타나는 신박함도 보여주었다. 요샛말로 너드라고 해야 하나.
일본에 대규모 지진이 발생했을 때였던 것 같다. 도쿄에 살고 있는 훈이에게 몇 년 만에 안부 전화를 했을 때, 훈이는 도쿄 변두리에 작은 주택을 마련했다고 했다. 도쿄에 놀러 오면 집에 머물게 해 주겠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 당시 5살짜리 아들이 얼마 전 자폐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던 중 훈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자기만 행복하면 되죠."
네 살배기 내 딸은 느리다. 관계 형성에 서투른 탓에 발달이 느리다고 한다. 가끔 '느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친구 가족과의 모임에서 도도해 보이는 친구 딸이 엄마에게 귓속말로 "쟤 바보 같아."라고 말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어른스러우면서도 설득력 있게 아직 초등학생인 친구 딸에게 내 딸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이 세상에는 바보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 줄 수 있을까?
상대를 바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상대를 평가했다는 의미이다. 평가는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이다.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 같지만, 대게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통념을 따른다. 별다른 근거도 없다. 그냥 세속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다. 평가기준은 체계적이기도, 종합적이지도, 구체적이지도 않다. 상대의 많은 부분 중 보고 싶은 단면만 보고 평가하는 것이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는 기둥 같이 생겼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근본 없는 평가를 바탕으로 한 비교는 무차별적 폭력성을 지닌다. 한 번 부정적 인식이 형성되면, 그 사람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대부분 비슷해진다. 찍히면 죽는 것이다. 세상 모두가 자신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해병대 정신력으로도 안 된다. 결국에는 평가를 당한 사람도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비교의 피해자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언제든,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전환될 수 있다. 비교란 녀석은 바퀴벌레 급의 번식력을 가지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온갖 것들을 다 대상으로 할 수 있고, 대상이 바뀌면 먹잇감도 바뀌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기에, 비교라는 전장에서 승리자는 없다. 모두가 패배자이다. 모두가 바보가 되는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공부해서 수능시험에서 만점을 받았지만, 블랙핑크 제니가 나오는 광고를 보는 순간 높아졌던 자존감은 수직 하강한다. 연말에 회사에서 '우수사원' 포상으로 받은 돈으로 아내에게 한 턱 내며 허세를 부리고 있는데, 지분 매각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번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자신이 초라해진다. 결혼까지 미루고 십수 년을 노력해서 꿈에 그리던 교수가 되었는데도, 너무나도 귀여운 친구 딸이 친구를 "아빠"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면 허탈해진다.
'왜 나는 계속 남과 비교하는 걸까'의 저자 폴 호크는 말한다. "나를 남과 비교할 때 대부분 실패하는 이유는 나의 단점과 남의 장점을 비교하기 때문이다." 열등감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부에 상관없이 찾아온다. 잘난 사람도 열등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애당초 비교 기준 자체가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비교란 이런 것이다. 다른 사람을 향했던 비교라는 잣대는 결국 돌고 돌아서 자신을 가리키게 된다. 더욱 무서운 것은, 타자에 대한 평가는 한두 번이지만 자신에 대한 평가는 평생 동안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쯤이면 행복에서 벗어나는 KTX에 올라 탄 것이다.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에서 인간배아 디자인 해커인 릴리 다우드나는 자신을 평생 괴롭혀 온, 자신의 얼굴에 있는 것과 똑같은 얼룩을 가지고 태어날 자신의 딸 올리브의 DNA를 개조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딸과 함께 얼굴에 있는 얼룩이 '이상함'으로 여겨지지 않는 마을을 만들어 얼룩이 '이상함'으로 여겨지는 시초지(지구)를 떠난다.
우리는 모두 얼룩 하나쯤은 가지고 산다. 얼룩 자체의 존재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와 비교하는 순간, 혹은 비교당하는 순간, 얼굴에 있는 작은 얼룩은 어느덧 존재감이 켜져 내 전체를 덮어버리게 된다. 내 몸의 1%도 안 되는 부분이 내 몸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해법은 하나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으로 타인도 바라보는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시선들이 모였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시초지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