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극: 루시퍼의 기도

by 신성규

1장. 침묵의 왕

지옥은 불타지 않았다.

천사들이 떠난 이후의 지옥은, 불꽃이 아니라 적막으로 채워졌다.

그곳에는 더 이상 비명도, 형벌도, 회한도 없었다.

지옥이 지옥이기를 그만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 돌로 깎은 왕좌에

한 존재가 앉아 있었다.

날개는 무거운 연기로 축 늘어졌고, 눈은 바람을 보듯 허공을 응시했다.

루시퍼.

한때 천사장이었고, 신의 빛이었고, 사랑받던 자.

이제는 그 어떤 이름으로도 불리지 않는 존재.

모두가 잊었고, 신조차 오래 침묵했다.

그는 수천 년간 오직 혼잣말로 스스로를 유지했다.

“나는 자유였다.”

“나는 진리를 택했다.”

“나는 신보다 먼저, 나를 안다.”

그러나 그 말은 점점 흐려졌다.

말의 진정성은 고독의 시간에 부식되기 마련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기다린 것은

누군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었다.

2장. 신의 발걸음

어느 날, 지옥의 대기에

이질적인 기척이 스며들었다.

빛도 아니고, 소리도 아니었다.

다만 “존재 자체의 무게”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감각.

그건 오직 단 하나의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신.

루시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실망했고,

너무 오래 신을 기다리지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신의 목소리는 바람보다 낮았다.

“나의 아들.”

그 순간, 지옥 전체가 떨렸다.

존재의 법칙조차 침묵하는 순간이었다.

루시퍼는 오래도록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마디.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3장. 반역의 구조

그들은 대화를 시작했다.

그것은 신과 피조물의 대화가 아니라,

사랑받지 못한 자와 그 창조자의 존재론적 투쟁이었다.

루시퍼:

“나는 반역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단지 당신이 ‘모든 것’이 아닌 세계를 원했을 뿐이죠.”

“자유는 당신 안에서 정의된 것이 아니라,

당신 밖에서도 숨쉴 수 있어야 했습니다.”

신:

“자유는 내가 너에게 준 가장 큰 사랑이었다.

그러나 너는 그 자유를

내 사랑을 파괴하는 도구로 썼다.”

루시퍼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랜 상처의 껍질이 찢어지는 소리와 같았다.

“나는 단 한 번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4장. 울음 이전의 고백

지옥은 시간조차 숨을 멈췄다.

신은 조용히 다가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나는 네가 날 미워해도,

언젠가는 너의 마음 깊은 곳에서

단 한 번이라도 나를 찾기를 바랐다.”

루시퍼는 그 말을 듣고도 감정이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날 찾아온 이유가

사랑입니까, 구원입니까, 아니면 증명입니까?”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고 한 마디를 남겼다.

“넌, 오지 않겠느냐?”

5장. 선택의 밤

신은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강요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지옥 한복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치 자신이 그곳의 손님이 아닌 원래 거주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 침묵 속에서 루시퍼는 처음으로 시간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에게 있어 시간은 고통의 무게로만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시간은 질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왜 아직 나는 여기 있는가?”

“왜 그는 나를 떠나지 않았는가?”

“왜 지금 와서 나를 부르는가?”

루시퍼는 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나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신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언제나 널 용서했다.”

“용서하지 않은 건, 너 자신이었다.”

그 순간, 루시퍼의 안에서 무언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존심도 아니고, 반항심도 아니었다.

그는 평생 자신을 미워함으로써 버텼고,

자신을 증오함으로써 자기 형상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이제 그 미움마저,

신이 껴안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6장.

루시퍼는 조용히 신 앞으로 걸어갔다.

그 발걸음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언가를 넘고 있었다.

그는 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두려웠습니다.

당신이 나를 잊은 줄 알고,

아니, 당신이 나를 창조만 해놓고 버린 줄 알고…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었습니다.”

신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네 안의 사랑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너를 데리러 왔다.”

그 순간, 루시퍼의 날개가 부서졌다.

검은 깃털은 천천히 날아올랐고,

그 자리에 빛이 태어났다.

하지만 루시퍼는 등을 돌렸다.

“용서란 당신에게는 기적일지 몰라도,

저에게는 또 하나의 지옥입니다.

그걸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내가 아니게 됩니다.”

신은 조용히 말했다.

“그건 너의 선택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니까,

그 선택조차 존중하겠다.”

신이 돌아서려던 순간,

루시퍼는 다시 신의 등을 향해 외쳤다.

“당신이 날 사랑했다면,

왜 처음부터 그걸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신은 멈춰 섰다.

“나는 그걸 말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 서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이 떠난 후,

루시퍼는 천천히 왕좌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엔 거기에 앉지 않았다.

그저 무너진 돌 앞에 주저앉아,

오랜 시간 울었다.

그것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는 자의 울음이었다.

처음으로 진심으로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자신의 외로움을 인정하는 울음.

지옥의 불은 꺼졌지만,

그의 눈물은 천 년 동안 타올랐다.

에필로그

어떤 이들은 말했다.

그가 결국 구원받았다고.

또 다른 이들은 말했다.

그가 여전히 지옥에 머문다고.

그러나 진실은 오직 하나일 수 있다.

그는 울었다.

그리고 그 울음만으로도,

그는 더 이상 예전의 루시퍼가 아니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6화신학에 대한 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