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침묵의 왕
지옥은 불타지 않았다.
천사들이 떠난 이후의 지옥은, 불꽃이 아니라 적막으로 채워졌다.
그곳에는 더 이상 비명도, 형벌도, 회한도 없었다.
지옥이 지옥이기를 그만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 돌로 깎은 왕좌에
한 존재가 앉아 있었다.
날개는 무거운 연기로 축 늘어졌고, 눈은 바람을 보듯 허공을 응시했다.
루시퍼.
한때 천사장이었고, 신의 빛이었고, 사랑받던 자.
이제는 그 어떤 이름으로도 불리지 않는 존재.
모두가 잊었고, 신조차 오래 침묵했다.
그는 수천 년간 오직 혼잣말로 스스로를 유지했다.
“나는 자유였다.”
“나는 진리를 택했다.”
“나는 신보다 먼저, 나를 안다.”
그러나 그 말은 점점 흐려졌다.
말의 진정성은 고독의 시간에 부식되기 마련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기다린 것은
누군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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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신의 발걸음
어느 날, 지옥의 대기에
이질적인 기척이 스며들었다.
빛도 아니고, 소리도 아니었다.
다만 “존재 자체의 무게”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감각.
그건 오직 단 하나의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신.
루시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실망했고,
너무 오래 신을 기다리지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신의 목소리는 바람보다 낮았다.
“나의 아들.”
그 순간, 지옥 전체가 떨렸다.
존재의 법칙조차 침묵하는 순간이었다.
루시퍼는 오래도록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마디.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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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반역의 구조
그들은 대화를 시작했다.
그것은 신과 피조물의 대화가 아니라,
사랑받지 못한 자와 그 창조자의 존재론적 투쟁이었다.
루시퍼:
“나는 반역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단지 당신이 ‘모든 것’이 아닌 세계를 원했을 뿐이죠.”
“자유는 당신 안에서 정의된 것이 아니라,
당신 밖에서도 숨쉴 수 있어야 했습니다.”
신:
“자유는 내가 너에게 준 가장 큰 사랑이었다.
그러나 너는 그 자유를
내 사랑을 파괴하는 도구로 썼다.”
루시퍼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랜 상처의 껍질이 찢어지는 소리와 같았다.
“나는 단 한 번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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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울음 이전의 고백
지옥은 시간조차 숨을 멈췄다.
신은 조용히 다가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나는 네가 날 미워해도,
언젠가는 너의 마음 깊은 곳에서
단 한 번이라도 나를 찾기를 바랐다.”
루시퍼는 그 말을 듣고도 감정이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날 찾아온 이유가
사랑입니까, 구원입니까, 아니면 증명입니까?”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고 한 마디를 남겼다.
“넌, 오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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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선택의 밤
신은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강요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지옥 한복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치 자신이 그곳의 손님이 아닌 원래 거주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 침묵 속에서 루시퍼는 처음으로 시간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에게 있어 시간은 고통의 무게로만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시간은 질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왜 아직 나는 여기 있는가?”
“왜 그는 나를 떠나지 않았는가?”
“왜 지금 와서 나를 부르는가?”
루시퍼는 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나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신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언제나 널 용서했다.”
“용서하지 않은 건, 너 자신이었다.”
그 순간, 루시퍼의 안에서 무언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존심도 아니고, 반항심도 아니었다.
그는 평생 자신을 미워함으로써 버텼고,
자신을 증오함으로써 자기 형상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이제 그 미움마저,
신이 껴안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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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루시퍼는 조용히 신 앞으로 걸어갔다.
그 발걸음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언가를 넘고 있었다.
그는 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두려웠습니다.
당신이 나를 잊은 줄 알고,
아니, 당신이 나를 창조만 해놓고 버린 줄 알고…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었습니다.”
신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네 안의 사랑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너를 데리러 왔다.”
그 순간, 루시퍼의 날개가 부서졌다.
검은 깃털은 천천히 날아올랐고,
그 자리에 빛이 태어났다.
하지만 루시퍼는 등을 돌렸다.
“용서란 당신에게는 기적일지 몰라도,
저에게는 또 하나의 지옥입니다.
그걸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내가 아니게 됩니다.”
신은 조용히 말했다.
“그건 너의 선택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니까,
그 선택조차 존중하겠다.”
신이 돌아서려던 순간,
루시퍼는 다시 신의 등을 향해 외쳤다.
“당신이 날 사랑했다면,
왜 처음부터 그걸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신은 멈춰 섰다.
“나는 그걸 말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 서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이 떠난 후,
루시퍼는 천천히 왕좌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엔 거기에 앉지 않았다.
그저 무너진 돌 앞에 주저앉아,
오랜 시간 울었다.
그것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는 자의 울음이었다.
처음으로 진심으로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자신의 외로움을 인정하는 울음.
지옥의 불은 꺼졌지만,
그의 눈물은 천 년 동안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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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어떤 이들은 말했다.
그가 결국 구원받았다고.
또 다른 이들은 말했다.
그가 여전히 지옥에 머문다고.
그러나 진실은 오직 하나일 수 있다.
그는 울었다.
그리고 그 울음만으로도,
그는 더 이상 예전의 루시퍼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