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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에 대한 고민

by 신성규

우리는 종종 이렇게 배운다.

악마는 구원받지 못한다.

사탄은 신의 반대이며,

그는 끝까지 악이다.


하지만 이 말은 한 가지 질문을 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사랑은 거기까지 닿을 수 없는가?”


기독교에서 구원이란

신이 베푸는 은총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은총은 자격, 혹은 믿음,

나아가 회개라는 조건을 전제한다.


즉, 구원은

“자기를 버리고 돌아온 자”에게 주어지는

합법적 선물이다.


그러나 그 구조에서

‘완전히 타락한 자’는 어떻게 되는가?


그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악마란 회개조차 불가능한 자,

영원히 닫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묻게 된다.


신의 사랑은 회개라는 조건 없이는

결코 발휘될 수 없는가?


불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보다

해탈과 윤회라는 개념이 더 중심에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업이다.

모든 존재는

자신이 지은 행위에 따라 결과를 받는다.


즉, 구원은 신의 선택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든 흐름의 결과다.


하지만 동시에 불교는 말한다.


지옥 중생조차도 언젠가는 다시 태어난다.

악도의 끝에도 깨달음은 가능하다.


여기엔 희망이 있다.

심연에 떨어진 존재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악마조차,

무한한 시간과 업보의 정화를 통해

다시 존재의 빛으로 나올 수 있다는 구조.



기독교는 말한다.

“신은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선택적이다.

“회개하는 자만 구원받는다.”

그러나 회개하지 못하는 자는?


불교는 말한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한한 순환 속에서 회복 가능하다.


하나는 사랑하지만, 구원에 조건을 붙이고

다른 하나는 조건은 있지만,

영원한 배제를 말하지 않는다.


악마는 신의 반대가 아니라,

신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믿는 구원은

너무 ‘선한 자’만을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어딘가는 지옥이 있기를 원한다.


그 누군가는

벌을 받아야만 속이 후련하고,

사탄은 반드시 저주받아야

정의가 완성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진짜 사랑일까?



만약 악마가 구원받을 수 없다면,

그는 존재하는 것 자체로 영원한 실패이다.

그는 ‘신의 반대’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도달 범위 밖에 있는 존재가 된다.


그건 사랑의 무한성에 대한 모순이다.

그는 미워할 존재가 아니라,

슬퍼할 존재여야 하지 않는가?


나는 묻는다.

신이 정말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지옥까지 내려갈 수 있어야 한다.

업보가 아무리 깊어도,

그것이 존재의 구원을 영원히 폐기할 수는 없어야 한다.


하나님은 악마도 구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인간의 희망이 아니라,

사랑의 무한성을 향한 절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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