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내가 타인의 고통을 지나치게 빨아들이는 존재가 아닌가 의심한다.
그 고통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것이 내 안에서 자라고 울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상한 일이다.
타인의 눈빛, 말투, 침묵의 질감조차도 내 상상 속에서는 하나의 서사로 자라난다.
그들의 상처가 너무나 선명하게 내 안을 통과하고,
그 통과한 자리에 아픔이 남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건 네 일이 아니잖아.”
“너무 예민해서 그래.”
“너는 감정에 휘둘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감정은 ‘휘둘림’이 아니라 ‘접속’이다.
나는, 나와 타인을 구별짓는 경계가 흐릿한 존재다.
그건 때로 지옥이지만, 나는 이 경계를 지키지 않기로 했다.
고통이 지나가는 통로가 되기로 했다.
고통에는 주인이 없다.
아니, 있어도 상관없다.
누가 먼저 울었는지, 누구의 슬픔이 더 오래됐는지 따지는 것은
결국 슬픔을 분리하고 고립시키는 일이다.
나는 그런 방식의 윤리보다,
슬픔을 ‘함께 짊어질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 고통이 나의 것이 아니었더라도
한순간이라도, 나의 언어로 번역하고,
나의 감각으로 품을 수 있다면
나는 나로서 충분하다.
이 감수성은 나를 자주 다치게 한다.
과거의 상처를 잊지 못하고,
상상은 상처를 예언하고,
내 기억은 어제의 고통을 오늘처럼 불러낸다.
그러나 이 기억력, 이 상상력,
이 감정의 혼란이야말로 나의 가능성이다.
세상이 외면한 아픔을
나는 꺼내어 빛 앞에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통의 주인을 묻지 않는다.
그게 나의 고통인지, 타인의 것인지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냥, 고통이 나를 지나가는 순간
그것을 외롭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뿐이다.
그 감정은 언젠가 언어가 되고,
그 언어는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린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고통을 짊어지는 존재로서,
또 하나의 구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