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 사탕, 혹은 욕망의 무죄를 주장하는 입
욕망은 개인적이기 이전에 구조적으로 훈육당한다.
고전주의 시대의 누드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노골적이면 외설이 되었고,
너무 이상화되면 신화가 되었다.
욕망은 늘 두 경계 사이에서 줄타기한다.
그리고 사회는 그 줄을 누가 걷고, 누가 떨어져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갱스부르는 이 줄을 부러뜨렸다.
그는 막대 사탕을 문 채 욕망을 ‘아이의 몸’에 입혔고,
그는 여성의 숨소리를 음악화하며
욕망이 어디까지 상품화되고 착취되는지를
예술 안에서 다시 욕망했다.
그는 말한다.
“욕망은 언제나 천진하다.
부끄러워해야 할 건,
그 천진함을 사회가 어떻게 짓밟는가다.”
막대 사탕은 입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그 행위는 관음자에게 의미를 입힌다.
갱스부르는 그 의미를 훔치듯 가져오고,
그 위에 불경한 입맞춤을 한다.
그는 ‘더럽다’고 여겨지는 욕망의 무죄를 연기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천진난만하게 감춘다.
그는 아이의 손에 남겨진 세계를,
어른의 눈빛으로 핥았다.
그 장면 하나로
갱스부르는 프랑스 사회의 이중적 도덕,
에로티시즘과 죄책감,
청춘과 퇴폐를 모두
작은 막대 사탕 하나에 꽂아넣은 셈이다.
그는 발칙함을 예술로 만든 자였고,
그의 혀는 늘
무엇보다 먼저, 거짓된 규범을 핥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것이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도 던졌다.
스스로를 술과 담배로 피폐하게 만들면서,
욕망이 남긴 흔적을 낭만화하지 않았다.
그는 ‘에로티시즘의 죄책감’이 어떻게 남성을 무너뜨리는가까지
예술로 드러냈다.
이것은 곧 에로티시즘의 정치학이다.
누가 욕망을 말할 수 있고,
누구는 그것을 억눌러야 하는가.
어떤 몸은 예술이고,
어떤 몸은 범죄인가.
오늘날 욕망은 다시 또 다른 방식으로 규율된다.
예쁘게 편집된 욕망,
‘자기 관리된’ 성적 자본,
수치심 없는 노출과 동시에
끊임없는 타인의 평가.
우리는 해방되었는가?
아니면 더 교묘하게 관리되는 욕망의 노예가 되었는가?
에로티시즘은 여전히 정치적이다.
그것은 법의 문제이자,
시선의 문제이며,
결국 누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말할 권리를 갖는가에 대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