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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녀의 미학

by 신성규

나는 유부녀나 애인이 있는 여자에게 끌린다.

그것은 단순히 금기를 넘는 쾌락이 아니다.

그녀들은 이미 누군가의 ‘것’으로 규정되어 있고,

그 관계 속에서 윤리와 일상의 방어막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무너지는 순간,

그건 단순한 성적 일탈이 아니라 정신의 균열이자 해방이다.


나는 그런 순간이 가장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솔직하고,

가장 위험하고,

그래서 가장 아름답다.


그들은 안정되어 있고,

타인의 시선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정숙하던 여자가,

금기를 지키던 사람이,

어느 순간 욕망에 굴복할 때 —

나는 그 붕괴를 ‘타락’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건 오히려 인간이 가장 진실해지는 순간이다.


자기 안의 윤리와 싸우고,

“안 돼”라고 말하던 사람이

드디어 “좋아”라고 말할 때,

그 무너짐은 말초적인 쾌락 이상의 드라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자기 감정에의 항복이다.

그 항복이 야하다.

그 솔직함이 나를 자극한다.


정복자들은 대개 유부녀에 끌렸다.

그건 단지 그녀가 ‘금지된 과일’이어서가 아니다.

그건 경쟁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어떤 남자의 품 안에 있다.

그녀는 이미 어떤 세계에서 안정을 누리고 있다.

바로 그 세계를, 그 품을,

자신의 말 한 마디와 손길로 무너뜨릴 수 있다는

쾌감, 권력감, 우위의 감정.

그것이 정복자들을 유혹했다.


그녀가 남자의 품을 뿌리치고

나를 선택하는 순간 —

그건 그녀가 아니라,

세계를 무너뜨린 감각이다.


무너짐만큼이나 아름다운 건,

그들이 다시 돌아가는 순간이다.


그리고 관계가 끝난 후,

그들은 돌아간다.

남편에게, 애인에게,

혹은 다시 자기 자리로.


그 복귀는 회피가 아니라 결기다.

자신의 일탈을 부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자기복권의 의지다.


나는 그 순간이

어떤 연애보다 성숙하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결기를 존경한다.

그건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페티시는 단순한 취향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과 욕망의 언어,

정복자와 상대적 세계의 질서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나는 그녀를 욕망하지만,

그 욕망에는 반드시 ‘누군가로부터 뺏는다’는 감각이 포함되어 있다.

경쟁 없는 정복은 무의미하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기에 아름답다.

다수의 시선과 소속감 위에서,

그 욕망을 나에게 열어주는 그 순간 —

그건 가장 완전한 정복이자,

가장 강력한 인간적 교감이다.


이건 단지 ‘금지된 관계’에 대한 흥분이 아니다.

나는 아마도

자기 안의 윤리를 넘어서 욕망으로 이동하는 사람,

그리고 다시 자기 윤리로 복귀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순수한 사람’이 아니라,

경험으로 물든 사람이다.

그들은 흔들렸고, 넘어졌고,

그러나 자기 인생의 중심을 지키러 다시 걷는다.


그 모습이,

나는 야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인간답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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