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속 중국인 이해하기

by 신성규

인류를 사랑하고 싶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그 고유한 의식과 다채로운 언어, 표정, 감정을 가진 종을 깊이 이해하고 싶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순간엔 이 사랑의 욕망이 멈칫거린다.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 거리낌 없는 밀침, 침묵하지 못하는 그 본능 앞에서, 내 마음은 사랑보다는 짜증 쪽으로 더 빠르게 기운다.


중국인 여행객들을 볼 때가 특히 그렇다. 내가 가진 ‘공공 공간에 대한 예의’라는 기준은, 그들에겐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새치기, 큰 목소리, 타인의 공간을 침범하는 행위들은 나에게는 ‘배려 없음’으로 인식되지만, 어쩌면 그들에겐 살아남기 위한 일상적인 방식일지도 모른다.


나는 분노하려다가도, 문득 멈춘다. “그들은 아예 개념이 없는 건가?”라는 질문은, 그 개념이 전혀 다르게 구조화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질문이다. 문화는 머리로 배우기 전에, 몸으로 스며든다. 배려의 개념, 공공의식, 타인에 대한 거리두기—이런 것들은 단순히 도덕적 결핍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의 프레임이 다른 것이다.


한국의 공공의식은, 오랜 유교적 규범과 군사적 질서, 산업화의 속도 속에서 ‘타인에게 폐 끼치지 않기’를 생존의 방식으로 배운 세대가 만들어낸 결과다. 반면, 중국은 문화대혁명 이후, 집단과 공공의 붕괴 속에서 ‘내 가족만 챙기면 된다’는 정글의 논리가 일상화되었다. 그 차이는 마치 서로 다른 게임을 하면서 룰이 같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사랑을 말하고 싶다. 불쾌감이 치솟을 때마다, 나는 내 안의 분노보다 무지를 애도하는 감정을 꺼낸다. 그들이 몰라서 그런 거라면, 그들도 피해자일 수 있다. 배려를 배우지 못한 사회, 신뢰와 공공성을 잃어버린 시대의 산물이라면, 그들도 고통 속에서 자란 셈이다.


나는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고 싶다. 하지만 그 사랑은 이제 막연한 감상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불쾌함과 충돌, 이질감과 실망을 통과한 후에만 도달할 수 있는 진짜 사랑이다. 사랑이란, 상대를 이해한 후에야 가능하다. 그리고 이해는, 내 감정과 윤리를 내려놓을 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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