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흔히 타인과의 사랑 속에서 자기 완성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실존철학적 시각에서 볼 때, 사랑과 섹스는 본질적으로 타인의 세계와 결합되는 사건이며, 따라서 불안정하다. 타인의 욕망, 감정, 가치가 개입되는 순간, 나의 자아는 흔들리고, 종종 타자의 세계에 종속된다.
하이데거가 말한 불안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내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망각한다. 사랑조차도 타자에게 매달리는 방식으로 왜곡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가 강조했듯, 절대적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은 사랑을 결핍의 보상으로 사용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자기 상실로 이어진다.
윤리학적 관점에서도, 자기 사랑이 결여된 사랑은 문제적이다. 칸트는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고 했지만, 내가 나 자신을 목적 그 자체로 존중하지 못한다면, 타인 또한 진정한 목적으로 대우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자기 사랑을 모든 덕의 기초로 보았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는 타인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로서 완성되려면 우선 타인과 분리된 자리에서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 이때의 분리는 고립이 아니다. 그것은 결핍이 아닌 충만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행위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곧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언제나 나를 통해 주어지고, 내가 나를 수용하는 방식이 세계를 수용하는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도록 혼자일 때 불안했고, 고통스러웠다. 그 불안은 나를 사랑에 매달리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존적 사랑, 곧 결핍의 사랑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진정한 사랑은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충만에서 흘러나온다. 홀로 있음에도 충만하고, 혼자 있음에도 기쁨을 느낄 수 있을 때, 사랑은 비로소 타인에게 선물처럼 건네질 수 있다.
사랑은 타인을 통해 나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이미 완성된 나로부터 발산되는 힘이다. 실존적으로는 고독을 견디는 용기이고, 윤리적으로는 자기 존중에서 비롯된 책임이다. 나는 여전히 겁쟁이처럼 고독 앞에서 흔들리지만, 점차 깨닫는다. 사랑의 본질은 타자에게 매달리는 행위가 아니라, 홀로 선 자아가 세계와 관계 맺는 가장 성스러운 방식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