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예술가의 삶을 떠올린다. 그것은 어떤 낭만적인 전설처럼 전해지지만, 막상 그 안을 들여다보면 결코 낭만이라 부를 수 없는 세계다. 레이먼드 카버의 인생이 그 전형일 것이다. 공장에서 일하며, 술에 의지하며, 생활고에 허덕이면서도 그는 글을 썼다. 그의 단편은 삶의 가장 밑바닥을 살았던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냉정한 리얼리티를 품고 있다. 동시에, 어딘가 부서진 사람들의 내밀한 순간 속에서 희망의 작은 조각을 건져낸다.
나는 그 점이 늘 마음에 걸린다. 가난은 인간을 소모시키지만, 동시에 글을 밀어내는 압력이 되기도 한다. 절망이 없다면 절실함도 없다. 하지만 절망이 지나치면, 그 절실함조차 글로 바꾸기 전에 생존의 무게에 짓눌려 사라져 버린다. 예술가는 늘 그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다. 카버가 보여준 것은, 가난 속에서도 문학이 인간에게 남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무엇인지를, 아주 조용한 어조로 말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질문하게 된다. 예술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예술을 발명하는가? 카버는 후자에 가까웠다. 그는 구원받으려 글을 썼다기보다, 글을 쓰지 않으면 더 깊은 파멸로 굴러떨어질 것이 두려웠던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다듬어지되, 미학적 화려함보다는 절박한 숨결로 읽힌다.
오늘날 예술가의 삶을 낭만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배고픈 예술가’라는 이미지 뒤에는 사실 숱한 좌절과 파멸이 숨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척박한 삶의 토양에서만 자라나는 단단한 감각도 있다. 그것은 예술이 어떤 거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문장, 단 한 편의 단편처럼 미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희망의 증거를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 희망을 외치는 글이 아니라, 삶의 균열 속에서 어떻게든 스며나오는 희망의 미세한 빛을 잡아내는 글. 카버처럼 “인생이 썩 좋진 않아도, 그래도 살 만하다”라는 어조로 끝맺을 수 있는 글. 가난한 예술가의 삶은 불행과 희망이 교차하는 투명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는 그 단면이야말로, 우리가 예술을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