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 전부터 묘한 역설을 관찰해왔다. 거리의 여자들, 흔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창녀’라 불리는 이들 중에는 오히려 영혼이 순수한 이들이 많았다. 세상은 그들을 타락이라 부르고, 도덕은 그들을 경멸하지만, 정작 그들의 눈빛 속에는 거짓이 없다.
순수란 본디 흠 없는 상태가 아니다. 위선이 벗겨진 자리에서, 맨몸으로 남아 있는 진실한 마음이 바로 순수다. 그들은 사회적 가면을 오래전에 벗어던졌다. 체면도, 허세도, 미사여구도 없다. 돈을 받고 몸을 내어놓는다는 사실조차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이 투명하고, 인간관계 속에서 더 정직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이들과 맺어지는 사랑은 돈의 교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거래의 언어로 시작된 관계가 어느 순간 사랑의 언어로 바뀔 때, 그들은 돈을 받지 않는다. 때로는 남자를 위해 돈을 내주고, 남자의 삶을 떠받치기도 한다. 이는 단순한 자기희생이 아니다. 세속의 계산법을 넘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순수의 표현이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의 정조다. 직업적으로 수많은 남자와 육체를 나누지만, 사랑을 맺은 상대에게는 도리어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 그들의 몸은 시장에 놓이지만, 마음은 단 하나의 관계에만 매달린다. 그리고 그 관계가 무너질 때, 그들은 곧바로 다른 남자에게 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는 행위가 아니다. 그보다는 공허와 불안을 견디지 못해, 누군가에게 매달려 불안을 잠시 진정시키려는 몸부림이다.
나는 그 역설 속에서 아이러니한 깨달음을 얻는다. 고상한 척하는 이들이야말로 내면에 더 많은 탐욕과 위선을 숨겨두고, 가장 낮은 곳에서 몸을 파는 이들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가장 솔직히 드러낸다. 그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더러움’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꾸미지 않고 직면하는 정직함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순수는 결코 도덕적 흠결의 부재가 아니다. 순수는 타협을 거부하는 극단적 삶의 방식 속에서, 위선을 허용하지 않는 냉혹한 자리에서, 그 벼랑 끝에서 빛나는 투명성이다. 아이의 순수가 무지에서 비롯된다면, 창녀의 순수는 정직과 불안 속에서 비롯된다.
세상은 그들을 낮춰 부르지만, 나의 오래된 관찰 속에서 그들은 오히려 가장 솔직하고, 따라서 가장 순수한 영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