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단순한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구조 속에서만 타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의 고백

by 신성규

어떤 사람은 사람을 감각으로 이해한다.

표정의 미세한 떨림, 말의 억양, 눈빛의 온도.

또 어떤 사람은 경험으로 이해한다.

나도 그랬어, 나도 겪어봤어, 그러니까 너의 고통도 알아.


그런데 나는, 사람을 ‘구조’로 이해한다.

던지는 말 뒤에 숨은 심리의 패턴,

반복하는 선택 뒤에 자리한 세계 인식의 방식.

그래서 나는 이상한 사람들을 오히려 더 쉽게 이해한다.

괴짜, 예술가, 광인, 언어를 비튼 철학자.

그들의 파괴와 조롱은 오히려 나에게 명료하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보다,

그 말이 어떤 결을 따라 나왔는지가 중요했다.

목소리는 온도가 아니라, 문법이었다.

감정은 공감이 아니라 해석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낯설다.

누군가가 “그냥 유명해지고 싶어서”, “돈 벌고 싶어서”라고 말할 때,

그 안에서 어떤 질서의 욕망도, 심리적 모순도, 맥락적 복잡성도 찾지 못할 때,

나는 오히려 그 단순함에 당황한다.

그런 대답들은 내게 너무 낯설다.

정말 그것뿐이라면,

나는 그 사람에게 다가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감정은 해석을 전제로 한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설명이 없다.

욕망은 정당화될 필요 없이 존재하고,

그 존재가 의심받지 않기에 그들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설명 없는 충동을 신뢰하지 못한다.

그래서 ‘단순한 욕망’은 오히려 내게 불투명한 기호다.


나는 비틀린 문장을 해석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너무 직선적인 언어는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너무 당연한 감정은 내 감각을 무디게 한다.

나는 ‘복잡한 해석 가능성’ 속에서만 타인을 느낀다.

그래서 예술가의 무너짐엔 공감하고,

보통 사람들의 분노 앞에선 당혹해진다.

나는 타인의 고통을 먼저 해석해야만 느끼는 사람이다.


사랑조차도 이해하고 나서야 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삶을 논리적으로 설득하지 않고서는

그의 고통에 감정적으로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때로 너무 늦었고,

때로 너무 차가웠다.


세상은 직선으로 말하고,

나는 곡선으로 이해하려 한다.

세상은 지금을 살고,

나는 항상 맥락을 되짚는다.


그렇게 나는 늘 몇 걸음 뒤에서 감정을 이해했고,

사람들은 이미 내 곁을 떠난 후였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다.

이것은 외로움의 근거다.

세상은 대부분 ‘단순한 욕망’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없어

많은 사람들과 멀어진다.

그건 고독한 방식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구조 속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누구든,

그 사람의 진심을 찾을 수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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