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세상은 아직 구름 같고, 단어들은 껌처럼 입안에서 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나이에 나는 문득,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공포를 마주했다. “인간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 이 질문이 처음 내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나는 그저 궁금했던 게 아니었다. 나는 실제로 무너졌다. 세계가 갑자기 의미를 잃고,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른들은 그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애가 왜 그런 걸 생각해?” 나는 당황했다. 내가 이상한 걸까? 왜 아무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너무 이른 나이에, 존재에 대한 공포를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그 질문은 나를 오래도록 따라다녔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도, 친구들과 놀다 문득 정신이 혼자 멀어질 때도. 죽음이라는 단어는 단지 끝을 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의미의 붕괴,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근거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손을 보았다. 지금 이 손은 정말 ‘존재’하고 있는가? 나는 내가 있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철학의 시작이라는 것을.
지금 돌이켜보면, 그 질문은 나를 ‘이상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나를 ‘사유하는 존재’로 밀어 올린 사건이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인간은 ‘죽음을 향해 존재하는 자(Dasein)’다. 죽음은 단지 끝이 아니라, 존재를 각성시키는 계기다. 나는 그것을 다섯 살에 경험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 공포를 언어화하고, 사고로 마주한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그 공포 속에서 삶의 의미를 건져 올리고자 발버둥쳤다. 그것은 어린 나에게는 너무 큰 짐이었지만, 동시에 지금의 나를 만든 뿌리였다.
죽음은 여전히 두렵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것을 ‘생각하는 나’의 증거로 삼는다. 다섯 살의 나는 울었고, 지금의 나는 묻는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그때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이제 사유의 불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