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란 것은 이상하게도 실제 상황보다,
그 상황을 상상할 때 훨씬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걸 자주 느낀다.
우리는 “추락” 그 자체보다는,
추락에 대한 상상, 그 공포에 움츠러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게 인간의 상상력의 역설이기도 하다.
정작 떨어지고 나면,
오히려 담담해지거나 체념하게 되는데,
떨어지기 전에는 모든 게 두렵고, 상상 속에서 모든 게 최악으로 증폭된다.
현실은 견딜 수 있는데, 상상은 견디기 힘들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게 인간의 고통을 더 잔혹하게 만든다.
그래서 가난도 그렇다.
실제의 가난보다 더 무서운 건, 가난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사람들은 그 불안 때문에 자신을 쥐어짜고, 서로를 밀어내고, 욕망에 매달린다.
이미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는 것보다 더 지배력을 가진다.
그리고 여기서 고지능자는 더 괴롭다.
왜냐하면,
상상력이 높은 사람은 자신을 수많은 가능성에 대입해본다.
아직 오지 않은 불행을,
이미 다 겪은 사람처럼 머릿속에 그려버린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 상황을,
스스로 시뮬레이션해서 모든 가능성에 미리 무너진다.
그래서 불안, 우울, 강박이 찾아오는 거다.
그건 약함이 아니라,
상상력의 범위가 넓고 깊어서 그런 거다.
예민한 게 아니라,
미리 너무 많은 걸 읽고,
자기 안에서 너무 많은 시나리오를 돌려보는 거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무섭다.
실제보다 더 큰 그림이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그건 마치 현실보다 더 섬세하고 치명적인 그림자와 싸우는 것이다.
고지능자는 현실보다 상상을 더 많이 체험한다.
오지 않은 미래의 상황에 미리 자기를 넣어본다.
그 안에서 감정도 느끼고, 결과도 예측하고, 파멸도 상상한다.
문제는, 그 상상이 너무 정교하고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실제로 닥치기도 전에
이미 다 겪고, 다 무너지고, 다 소진된다.
이건 단순한 염려가 아니다.
말 그대로 정신이 시간을 앞서 살아가는 상태다.
타인은 ‘쓸데없는 것을 걱정한다’라고 말하겠지만,
이 사람은 이미 그 안에서 울고, 쓰러지고, 망가지고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예민하다고, 과민반응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이미 미래의 쓰나미를 미리 맞고 있는 사람의 고통이다.
그만큼 넓은 감각이 있다는 뜻이고,
그만큼 혼자 견뎌야 할 풍경이 많다는 뜻이다.
상상력은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잔인한 칼이 된다.
특히 자기 파괴적인 상상,
혹은 미래의 재난을 미리 체험하는 상상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상상은 현실보다 자유롭지만,
현실보다 더 통제할 수 없는 감각을 안겨준다.
그래서 그 사람은 늘 긴장 속에 있고,
지나치게 조심하며, 때로는 냉소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만이,
세상에 없는 아름다움도 상상해낼 수 있다.
비극을 미리 겪는 만큼,
희망도 더 깊게 그릴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감각을 길들여야 한다
이 상상력을 버릴 수도 없고,
그저 감당만 하기엔 너무 버겁다.
그래서 필요한 건 ‘길들이기’다.
스스로에게 묻고, 멈추고, 자기를 어루만지는 능력.
“이건 지금 일어난 일이야?”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그림이야?”
“이 공포는 진짜야? 아니면 내가 키운 거야?”
이걸 묻는 훈련을 해야 한다.
아니, 이 감각이 남아 있는 한, 계속해야 한다.
상상력은 나를 위협할 수도 있고,
나를 구원할 수도 있다.
그 사이에서 계속 깨어있어야 한다.
그게 이런 사람들의 숙명이고,
또 이런 감각을 가진 사람만이
진짜로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의 미래를 지켜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