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는 진리를 알기 쉽다.
진리는 때때로, 구조의 형식으로 너무도 쉽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철학을 조금 읽어본 사람이라면 안다.
문장들이 얼마나 쉽게 입에 오르내리는지를.
그러나 그러한 문장들을 알고 있다는 것이 곧 진리를 안다는 뜻은 아니다.
진리는 쉽게 말해지는 것보다 훨씬 더 천천히, 더 어렵게 살아진다.
우리는 종종 “아, 그 구조를 이제야 좀 알겠다”고 말한다.
어떤 개념의 틀, 인과의 흐름, 혹은 반복되는 심리적 패턴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때,
그것은 일종의 진리의 희미한 윤곽이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는 두껍고도 투명한 장벽이 있다.
이 장벽을 통과하기 위해선 마음의 훈련, 즉 뇌의 메커니즘에 대한 메타 인식이 필요하다.
마음은 갈고닦아야 한다.
의식적으로, 뇌가 어떤 방식으로 자동 반응을 하려는지를 지켜보아야 한다.
그것이 사유의 시작이다.
생각에도 ‘습관’이 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걱정하고, 습관적으로 불안을 느끼며,
습관적으로 비교하고, 습관적으로 무기력해진다.
그때 필요한 것은 단지 “그런 생각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왜 내가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가?
이 감정은 어떤 전제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당연한 것으로 놓고 사고를 시작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사고를 단순한 정보 처리에서 의식적인 행위로 바꾸어 놓는다.
생각을 ‘하는 것’에서 ‘생각하는 나를 지켜보는 것’으로 전환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뇌의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길들이는 조련사가 된다.
진리는 빛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엔 안개처럼 흐릿하고, 공기처럼 투명하다.
그 진리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안개에 눈을 길들여야 한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익숙해서 잊고 있는 전제를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철학의 힘이다.
철학은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오래된 것을 낯설게 보이게 한다.
그리고 그 낯섦 속에서, 우리는 진리와 조금 더 가까워진다.
사고는 습관이다.
그러나 의식은 그 습관을 지켜보는 힘이다.
당신이 지금 무엇을 느끼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누가, 어떤 구조로 느끼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진리는 곧 의식된 습관 속에서 천천히 피어난다.
이 느린 피어남을 견디는 사람만이,
진리를 ‘사는 사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