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성인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인의 자격을 얻었을 뿐 성인의 역할을 하진 못했다. 부모님 도움이 없으면 대학금 등록비를 낼 수 없다. 옷을 살 수도 없다. 밥을 먹을 수도 없다. 대학교 전공서적 등 모든 비용을 부모님이 대주셨다. 출가할 수도 없었다. 부모님 댁인 18평 아파텔에서 계속 살고 있다.
방 2개, 화장실 1개인 18평 아파텔에서 부모님, 건장한 대학생, 초등학생이지만 큰 남동생 4명이서 지내기엔 좁았다. 공간의 크기는 그대로였지만 나와 남동생은 계속해서 성장했다. 심지어 나와 남동생 둘 다 고도비만이었다. 집이 좁게 느껴지면 마음의 여유도 작아지는 것 같다. 중고딩 때보다 대학생 때 부모님과 동생에게 화를 많이 냈다. 가정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사실 내 탓이다.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고 생각했고 삶 전반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졌다. 남 탓, 가족 탓을 하기 시작했다. 예민해져서 가족들에게 말의 화살을 자주, 많이 쏘았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생각하며 후회했지만 나도 모르게 반복했다. 놀면서 술만 먹었다. 이건 제대로 잘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갈수록 마음이 불편했고 집에 있을수록 답답함만 더해졌다. 결국 남들보다는 조금 더 빨리 군대를 갔다.
전역하면서 우선 경제적으로 독립하려고 했다. 군대까지 다녀온 남자가 부모님께 손을 벌려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중학생이 된 남동생을 책임지고 있는 부모님께 내 삶까지 보태달라고 할 수 없었다. 생활비는 내가 스스로 벌어야 했다. 군대에서도 돈을 모았고 전역하는 다음날부터 알바를 시작했다. 식당에서 서빙을 하기도 하고 주방에서 설거지 알바도 했다. 과외 학생을 구해서 과외도 했다. 대학교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기도 했다.
다행히 대학교 학비 부담은 없었다. 국립대라서 학비는 저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구 소득이 낮아서 국가장학금으로 4년 학비의 대부분이 해결됐다. 돈 없어서 선택한 국립대가 돈 걱정은 덜어주었다.
18평 아파텔에서는 어떻게든 나오려고 했다. 알바와 과외를 하며 생기는 돈으로 단기 원룸을 구하기도 했고 대학교 기숙사에서 살기도 했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집에 들어갔다가 돈이 생기면 집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렇게 해선 앞으로도 출가하기엔 힘들 것 같았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부모님께 서울 가서 살겠다고 독립선언했다.우리 집도 좁은데 서울로떠나서 살아보겠다고. 아직 대학 졸업은 안 했지만 일단 가서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가서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해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부모님은 걱정했지만 승낙해 주셨다.
2013년 5월, 처음 본 광화문 광장은 나를 매료시켰다.
서울은 고등학생 때부터 가고 싶었다. 대학생이 되어 대외활동으로 서울에 자주 가게 되면서 잊고 있던 상경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서울에 가볼수록 서울은 다양했고 지방은 정체된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을 하게 될 진 모르겠지만 서울에서 하는 것이 기회가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로 가는 것이 나의 운명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