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마일리지: 목적과 충만 사이에서 나를 지키는 법

by 장서나

가끔 한 번씩 괜히 주눅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올린 이 글에는 사백여 개의 '좋아요'와 댓글이 달렸다.


그날, 나는 스레드에 이런 글을 남겼다.

스레드의 단점

너무 다들 대단해 보여서
가끔 자신감이 떨어진다.

다들 왜 이리 말 잘해?
다들 왜 이리 똑 부러져?
다들 왜 이리 트렌드를 잘 알아?

나 너무 늦게 시작한걸까..
마흔 넘어 시작한 내가
경쟁력 있을까..

인스타에서 다들 이쁘고 멋져서
인스타 잘 안 했던 거였는데
이젠 스레드에서 다들 넘 멋지네ㅎ

내 스레드에만
다 멋진 사람들만 있는 거야?

댓글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었다.

첫 번째는, 이 상황을 웃음으로 가볍게 풀어주는 사람들이었다.

멋진 사람들만 즐겨 봐서 그래~ 내 스친들은 다 나처럼 바보 멍충이들인데~ㅋㅎㅎㅎ @kdw_fever(가수 김동완)
음메 기죽어~ @mr_river_side


두 번째는, 같은 마음을 겪어봤다며 공감하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나도 마흔 넘었고, 이제 막 시작했어. 그리고 나도 스레드 보면서 대단한 사람들 너무 많아서 위축되더라ㅠ 좀 늦더라도 꾸준히 가보자 하고 있는 중, 화이팅! @ai.film.lab
나도 완전 공감이야 하지만 우리 비교는 하지 말자규~ @justcat


그냥 스쳐 지나칠 수도 있었을 글에, 자기도 '똥멍청이'라고 해주고, 괜찮다고 웃어주고, 진심으로 응원을 건네준 마음이 유난히 고마웠다. 그 다정한 댓글 하나하나에 일일이 대댓글을 달면서 나는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내가 느꼈던 '주눅 듦'은

자존감이 낮아서 생긴 감정이었을까.


아니면,

자존감을 쌓아오던 방식

잠시 흔들렸던 걸까.



비교가 만든 열패감의 이유


조남호 대표는 『공허의 시대』에서 열패감과 허무의 원인을 '목적주의'에서 찾는다.

'목적주의'는 현대인의 무의식 깊숙이 뿌리내린 절대적 기준이자 의미 있는 삶을 판별하는 대전제로 가능해왔고, 우리 모두는 그 기준을 의심 없이 따르며 그에 맞춰 인생을 설계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기준 자체가 처음부터 틀린 것이라면 어떨까요? 당신이 지금 공허하다고 느끼는 건 가치 있는 삶에서 멀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 목적주의를 따르는 삶은 영원히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목적에 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자학에 가까운 짓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몰아붙이고, 방법을 바꾸고, 하루하루를 설계하며 온 힘을 쏟아붓죠. 하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 달렸어도 돌아보면 '왜 이렇게까지밖에 못했을까' 하는 자책과 허무만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목적, 계획, 의지, 달성, 성취 모두 허상이며 '목적주의' 대신 '충만주의'를 표방하자고 한다. 어떤 경험이든 전심, 전력, 몰두, 몰입하고, 거기서 충만함을 느끼면 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스레드를 넘기다 괜히 손이 멈췄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이미 정해진 기준표 앞에서 자신을 스스로 '뒤처진 자'로 호명해 버린 순간 말이다. 그날의 주눅은 단순한 비교가 아니었다. 아직 가보지도 않은 결승선을 먼저 상정해 두고, 거기 닿지 못한 나를 미리 실망하게 해버린 마음의 태도였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목적주의가 나를 멈추게 할 때가 있다는 것은 맞다. 하지만 한편으론 목적주의에 대해 지나친 회의감을 갖는 것이 왠지 불편했다.

우리가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세분화해서 달성하려는 이유는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삶의 많은 부분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고, 내가 한 노력이 100%의 성취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한 노력이 다른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노력하는 과정에서 전심으로 전력을 다하면서 기쁨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니까 목적주의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목적을 가지려는 이유는 목표를 세워서 잘 해내려는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맹목적으로 목적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막상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욕심이 난다는 점이다. 다 알고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누구든 실패보다는 성공의 달콤함이 좋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SNS가 일상화되면서 누군가(심지어 나보다 한참 어린)의 성공을 너무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게 또 다른 문제다. 실패의 이야기도 있지 않냐고? SNS상의 실패 이야기는 순수하게 실패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서의' 실패가 대부분이다. 이미 성공한 이들의 실패 사례는 더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만들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열패감과 허무함을 쉽게 느낄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나친 목적주의에 대한 비판이 꼭 필요한 건 사실이다.


책의 마지막 파트에서 저자는 '충만주의'의 회복을 강조한다.

내가 더 감각할 수 없는 한계치까지, 내가 더 능력을 쏟아부을 수 없는 한계치까지 도달해야 충만입니다. 커피에서 더 이상 맡을 향이 없는 상태가 충만입니다. 일에 더 이상 쏟아부을 두뇌 능력이 없는 상태가 충만입니다. (…) 충만은 내가 기준입니다. 그래서 내가 알기 쉽고 행동하기 쉽습니다. "눈앞의 경험에 해당하는 감각과 능력을 총동원해 나의 한계치까지 머리와 마음과 몸을 그 경험으로 가득 채운다." 이것이 충만의 심플한 행동 방법입니다.

충만주의에 대한 설명을 읽어가면서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충만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조차 또 다른 '숙제'나 '목적'이 되는 건 아닐까?'


쉼 없이 달리는 목적주의에 지친 이들에게 다시 '한계치까지 몰입하라'는 충만주의를 권하는 건, 어쩌면 갈증이 난 사람에게 바닷물을 마시라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목적과 충만 사이, 고난이 선물한 '3無'의 지혜


목적주의. 나에게 목적주의란 '힘들지만 나를 성장시킨 것'이다. 새로운 도전을 하게 했고, 좋은 에너지의 사람들을 만나게 했다. 새로운 삶을 열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적주의는 무조건 나쁘고 충만주의는 무조건 좋다고 하고 싶지 않다. 목적주의자로서의 나는 목표를 세우게 하고 끝까지 해내게 했으며, 충만주의자로서의 나는 그 순간들을 즐길 수 있게 해줬다(그건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느꼈다. 책을 읽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떠올라서 글을 적었고, 한 장 쓰려다 두 장, 세 장 계속 이어 써졌다).


이런 삶의 관점을 갖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고난 덕분이다. 수의학 박사. 세 아이 엄마. 이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고 오랜 시간 견뎌야 했다. 거기에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너무 많이 겪다 보니 계획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는 '3無'의 득도를 하게 됐다. 한계치까지 도달하는 충만 대신, 오히려 힘을 빼는 '내려놓음'에서 답을 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힘을 뺀 자리에 남는 자존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성취도 계획도 없을 때 남는 나를 여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가 배운 자존감은 늘 무언가를 '잘 해냈을 때' 주어지는 보상에 가까웠다.



자존감은 '성적표'가 아니라 '태도'다


우리는 흔히 모리스 로젠버그 박사의 자기 존중감 척도(SES, Self-Esteem Scale) 같은 테스트로 자존감을 측정한다. 자신의 가치, 장점, 능력, 자긍심, 긍정적 태도, 만족감, 존중 등을 점수로 확인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 테스트 역시 결국은 쓸모, 성공, 능력이라는 기준 위에서 자신을 평가하게 만든다.


반면 우리말샘 사전이 정의하는 자존은 다르다.

스스로 자기를 소중히 대하며 품위를 지키려는 감정


여기에는 능력이나 성과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태도'만 있을 뿐이다. 불안함은 자존감이 낮아서 생기는 결함이 아니다. 더 잘 살고 싶어 하는 건강한 인간의 증거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안을 무조건 없어져야 할 신호처럼 오해하며, 그 감정을 곧바로 '자존감 저하'라는 이름으로 묶어버린다. 어느 정도의 불안은 문제가 아니라, 흘려보내면 되는 감정이다.


나는 자존감이 낮지 않다!

자존감이 낮다는 생각을 버리려 한다.

자존감이 낮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믿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해 나가고 있다.

그 과정에 느끼는 불안감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을 분명히 새겨두고 싶다.


나는 이미 스스로 나를 소중히 대하며 존중하고 있다.


대단해 보이는 도전을 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매일을 살아내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한 도전이다.

오늘의 나를 먹이고, 할 일을 하고,

나아가서 누군가를 돌보고 마음을 나누고 사랑하는 일.


그 모든 과정이 이미 나를 살리고 높이는 일이다.



자존감은 '적립'이 아니라 '정가'다


자존감이 낮아졌다고 느끼는 순간은 사실 내 존재가 작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자존감 마일리지를 적립하는 방식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무언가를 해냈을 때, 타인에게 인정받았을 때, 누군가에게 쓸모 있어 보일 때만 자존감이라는 포인트를 적립해 왔다. 이 포인트 시스템의 치명적인 결함은 '상대평가'라는 점이다.

누군가의 뛰어난 성취를 마주하는 순간, 내 장부는 순식간에 마이너스로 돌아선다. 그 사람의 능력이 커 보이는 만큼, 내 가치는 상대적으로 하락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극적인 '자아 할인(Self-Discount)'이 시작된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가치 없어", "도움이 되지 못하면 의미 없어"라며 스스로에게 박한 가격표를 붙인다.


이 불공정 거래를 멈춰야 한다. 타인의 SNS가 화려한 마일리지 명세서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나의 '원금'을 해쳐서는 안 된다.


자존감은 쌓아 올리는 적립금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정가(Fixed Price)'여야 한다. 성과가 없는 날에도, 비교에서 밀린 순간에도, 아무도 나를 호명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는 가격. 내가 무엇을 해냈느냐가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단단한 태도가 그 가격을 결정한다.


타인의 성취 앞에서 내 가치를 할인하지 않는 태도, 쓸모와 결과를 증명하지 않아도 자신을 스스로 정가로 대우하는 연습. 그것이 자존감을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어 전략이다. 우리는 더 많은 마일리지를 적립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이미 충분한 원금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비교가 시작되는 순간

'나는 지금 나를 할인하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에게 한 번만 물어보자.



그리고 아무 일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이 하루를

오늘의 내가 오롯이 누리게 해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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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노트]

나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건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걱정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남의 것을 빌려서 하지 않고, 나 자신으로서 부유해지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사건밖에 보지 못한다. 각자 속으로는 열병과 공포심으로 가득하면서 겉으로는 태평한 얼굴을 보일 수 있다. 그들은 내 마음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내 용모밖에 보지 못한다.

— 미셸 드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문예출판사, 2025, <영광과 명성에 대하여> 중에서

몽테뉴는 타인이 아닌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깊이 고찰했습니다. 그가 경계한 '남에게 빌려온 것'은 우리가 타인의 인정이나 사회적 직함에 기대어 얻는 일시적인 만족을 뜻합니다. 이는 자존감 마일리지라는 교묘한 형태로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허상에 삶의 무게중심을 두면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며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타인의 평가 대신 묵묵히 자기 내면을 살피고 기록하며,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 본연의 가치'를 지켜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고난 뒤에 터득한 삶의 태도와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외부에서 채워지는 마일리지에 연연하지 않을 때, 이 순간의 충만함을 오롯이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당신을 어떤 수식어로 부르든,

그 껍데기를 벗어낸 '사람으로서의 나'를 먼저 받아들일 수 있길.

시선을 외부에서 내부로 돌려 스스로에게 경외심을 갖길.

당신은 무언가를 빌려와야만 풍요로워지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부유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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