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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평안하시길 8

질투는 나의 것

by 빛나다

"언니 나 요즘 너무 힘들다"


마흔세 살에 일곱 살 딸아이와 태어난 지 이제 5개월이 지난 아들을 둔, 동생의 주말을 깨는 신음이다. 쉬는 날이라 맞춰 놓은 알람을 해제하고 늦잠을 자겠다 했던 의지는 동생과의 이른 전화통화로 가볍게 날아간다.


동생은 어제 첫째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 아이가 하원을 한 상태였고, 어린이집에서 어떤 특별한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오늘도 뭐가 또 있구나 하는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고 한다. 전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술시간으로 아이들은 그림을 그렸고, 요즘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림 실력이 늘어난 조카딸도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우리 집안은 대대손손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 그림 그리기를 마친 조카딸은 친구들의 그림을 구경하다 한 친구의 그림을 보고는 선생님께 다가가 "선생님 저 애 그림 못 그려요" 하고 흉 아닌 흉을 보았고 선생님은 친구 그림을 그리 말하면 안 된다고 타일렀는데 조카딸이 대뜸 울어버려 달래 주었다고 한다.


"언니 우리 딸이 말한 친구... 어린이집에서 그림 제일 잘 그리는 애야"


동생의 말에 의하면 요즘 부쩍 어린이집뿐만 아니라 태권도학원에서도 전화가 자주 온다고 한다.

친구들과의 잦은 다툼, 율동시간에 율동을 여러 번 거부하는 모습, 갑작스러운 교실 이탈로.

친구들을 좋아하고 춤추기를 흥겨워하며 선생님 껌딱지라 교실 밖은 선생님이 함께 나가자 하면 나가는 아이였는데, 이토록 변하니 애 엄마도 어린이집 선생님도 당황하는 날이 여러 번이다.


아무래도 5개월 전 둘째가 태어나면서, 그때 생겨버린 상실감이 첫째 아이의 마음에 여전히 남아있는 듯하다. 아무리 아빠, 엄마가 아이에게 세상에서 너를 제일 사랑한다 우리 집 보물은 너다(내가 우리 큰애를 달래며 한 말이다.)라고 수없이 말한다 해도 아이가 받은 상실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매번 사랑을 받고 있음을 확인받아야 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어 잊히지 않게 하려는 조바심을 달고 산다.


성인이 된 나도 가끔 조카딸의 모습을 보이곤 했다. 특히 나의 존재감이 흐지부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였다. 함께 일하는 후배가 나보다 일 머리가 뛰어나고, 빠른 업무처리를 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 나는 여기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씁쓸하기도 하고...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내가 여기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만큼 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란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었는데... 많은 시간이 흐르니 이 분야에서 나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돼버렸고, 나란 사람이 있었다는 걸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줄 것이라는 허망함을 안고 있자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내 일 정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동료들의 업무를 도와주고, 상사가 추가로 지시한 업무가 지금도 버거우면서도 건강까지 해쳐가며 완수했으며, 후배가 실수 하나 정도는 했으면 좋겠다는 졸렬한 마음을 두기도 했었다. 그러면 나라는 사람이 여기에 꼭 있어야 하는 인물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이석증이 심해 며칠 병원 진료를 받고 선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내 동생처럼 나도 선배에게 사는 게 힘들다고 했더니 선배에게 들은 말이다.


"예?"


"그 후배가 업무 능률도 높고, 업무처리도 빠른 걸 지금의 너와 비교해서 뭐 하냐고? 넌 너대로 지금까지 근 20년을 근무해 왔고 잘 해왔어. 그 후배는 후배대로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거고, 그런데 뭐가 문제야?"


"저는... 그래도 제가 그 후배보다 뭐든 잘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금까지 근무한 경력이 있는데"


"H야 네가 그 친구보다 경력이 많다는 건 알아. 하지만 경력이 많다고 해서 모든 걸 누구보다 잘할 수는 없어. 다만 그 업무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는 있지. 너는 후배랑 비교할 게 아니라 알려주는 걸 해야 하는 거야. 친구가 잘하고 있지만 혹시라도 네가 실수했던 길을 갈 때 나는 이런 점 때문에 힘들었어라고 말해주는 거.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건 그 친구가 선택하는 거고."


나는 참 부끄러웠다. 경력 근 20년이라는 게 무색하게도 나는 나이만 먹었지 성장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냥 좀스럽고 그저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기만을 원했다. 마치 일곱 살의 아이처럼.(아이는 어리기라도 하지... 비교하기에도 엄청 창피하다.)


지금의 난... 후배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하지는 않는다. 가끔, 아주 가끔 한다. 사람이라 그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하는 변명을 가지고 말이다. 그리고, 그 친구들에게 존경을 담은 말도 할 줄 안다.

"난 그렇게까지 생각 못했었는데 대단하다"


조카딸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곧 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엄마, 아빠의 사랑은 계속될 것이고, 아이는 그 사랑을 끊임없이 받다 보면 그냥 알게 되는 날이 올 테니.


나도, 나에게 계속 말한다.


지금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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