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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평안하시길 12

처음부터 진 싸움

by 빛나다

며칠 전 딸아이와 말다툼을 했다. 그것도 길거리에서.

다툼은 반려견 구름이의 정기적인 예방접종으로 동물병원을 가는데 딸아이에게 함께 가자는 데서 시작되었다.

“엄마,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오빠랑은 안 가고 왜 나하고만 가는 거야?”

엄밀히 말하면 딸아이는 동물병원에 서너 번 정도밖에 가지 않았다.(구름이는 태어난 지 1년이 넘었고, 월 1회 동물병원엘 간다.) 그런데 눈 동그랗게 뜨고는 마치 내가 저한테 부당한 지시를 내린 상사를 마주한 것처럼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답변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지만 차분하게 대응했다.


“오빠는 중3이라 수업이 늦게 끝나고, 오늘같이 비 오는 날은 엄마가 구름이를 안고 가니까 네가 우산을 씌어줘야 하잖아”


“그럼 다음에 가면 되지. 나는 학교 갔다 오면 혼자 있고 싶고 쉬고 싶어”


아!

혼자 있고 싶은 사춘기 딸을 몰라봐서 미안한 마음은 당최 들지 않고 그저 기가 차서 이 당돌한 자식(욕 아님.)에게 비겁한 말을 쏟아부었다.


“구름이 누가 키우자고 했어? 너야! 데리고 오면 네가 다 한다며! 귀 청소도 하고, 눈곱도 떼고, 항문낭도 짜주고 다한다며! 그래 놓고는 이제 와서 너는 쉬어야겠고 엄마가 다하라는 거야?”

비 오는 거리에서 마흔다섯 아줌마와 열세 상 여자아이는 서로를 한참 노려보았다. 그 가운데에 영문을 모르는 푸들 한 마리는 마흔다섯 아줌마의 품에 안긴 채 손가락을 핥고 있다.

딸아이는 작고 얇은 입술을 꼭 다문 채 아무 말도 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들고 있는 우산은 기울어진 지 오래되었다.


딸과의 첫 싸움이다. 내게도 이 순간이 온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퇴근 언제 하냐, 엄마랑 같이 있고 싶다 노래를 부르던 아이가 갑자기 딴 집 아이가 된 것처럼 데면데면하고 자기 시간을 방해했다며 꿋꿋하게 나를 쏘아본다. 지지 않고 나도 쏘아보았다. 근래에 나와 딸 사이가 간당간당하긴 했다. 자꾸 어긋나고 뭔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꾹 참았던 참이라 이번에 나도 할 말은 해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마주 보는데 요샌 말로 '현타'가 왔다.

자기주장이 강할 시기가 온 아이하고 싸워 뭘 얻을 수 있겠냐 싶은 생각과 괜히 세게 나가서 아이 성격에 더 반항심만 늘리는 건 아닌가 하는 근심, 그리고 내 딸도 제 오빠처럼 당연히 사춘기를 유연하게 보낼 것이란 섣불렀던 생각이, 어리석었다는 깨달음으로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뒤이어 나도 혼자이고 싶었던 때를 거치고 있는 딸아이의 마음을 내가 무시했다는 부끄러움이 진하게 더해졌다.


결국 먼저 사과를 했다. 엄마 생각이 짧았고, 아까처럼 비겁하게 말하는 게 아니었다고. 집으로 가서 넌 쉬고, 엄마는 비가 멈춰지는 걸 보고 병원에 다녀오겠다며.

아이는 그제야 따지듯이 말해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대로 집에 돌아온 딸아이는 제 방에,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구름이를 안은 채 창밖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의 방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휴대폰 음량을 높였는지 점차 크게 들렸다. 아이가 즐겨 부르는 여자 아이돌 노래지만 제목이 뭔지 모르겠다. 가사는 들리는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꼭 아이의 마음을 대하는 것만 같았다.


아이의 빠른 성장이 나를 이렇게 당혹하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이젠 인정해야 했다.

나도 자식 이기는 부모는 못 되는 보통의 엄마라는 걸. 암만 내가 사회생활 몇 년차고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도 자식한테는 무력해지는 엄마라 아이의 선두가 아닌 옆에서 바라보고 기다려야 한다는 걸.


어차피 처음부터 진 싸움이다.

(에고 이 세상에 내가 이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에피소드 하나.


건강검진을 약 한 달 정도 앞두고 있으면 체중 관리 기간으로 정해 식단조절이 시작된다. 그간 많이 먹고 잘 움직이지 않은 채점 결과를 뒤늦게 만회하고자 벼락치기를 하는 것이다.


탄수화물을 중심으로 세끼 모두 챙겨 먹는 것이 삶에 소임을 다하는 것처럼, 먹는 거에 진심인 내게 다이어트는 대단한 이벤트나 마찬가지다.


아침에 삶은 계란 두 개와 두유 하나, 점심 잡곡밥과 닭가슴살, 저녁 샐러드라는 식단과 함께 다이어트 보조제를 함께 먹으며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결론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식욕이 더욱 활발해져 샐러드 후 떡볶이 또는 라면의 단계를 밟는 행태로 자리 잡아 버렸다.


"언니 저 보조제까지 먹는데, 식욕이 늘었어요."

친한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칭얼대었다.

"이런 생각 안 해봤니? 너의 식욕이 보조제 효과를 이겨 먹는다는 걸?"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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