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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평안하시길 21

나의 무대 ~ing

by 빛나다

"우! 우!"


대학 연극 동아리 활동 중 첫 무대에 선 나는 원시인 3이었다. 헝클어진 머리, 검은색 분장물감이 치덕치덕 묻힌 얼굴, 언제든 버려도 이상할 것 없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걸걸한 목소리로 "우! 우!"를 외쳤던 스무 살의 나.


고등학교 친구들이 같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 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던 나는 동아리 활동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학교 임원을 스스로 맡을 정도로 대학 생활에 진심인 친구 하나가 동아리에 가입하고 싶다고 해서 동방(동아리방)이 모여 있는 건물에 함께 가게 되었다.

한참을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는데 복도 맨 끝 벽면에 붙여진 연극 동아리 홍보 대자보를 보게 되었고 나는 연극동아리에 가입했다. (친구는 어느 동아리도 가입하지 않았다.)


원시인 다음 역할은 춤바람 난 50대 전업주부. 엄마 옷을 몰래 가져와 입고 빨간색 립스틱을 과하게 칠한 후 무대(학교 강당)에 올라섰다. 대사 하나하나에 관객(학생들)들이 반응해 주면 그게 그렇게 신이 나 얼굴 표정, 목소리, 몸짓에 힘이 들어갔다.(연극이 끝난 후 친구로부터 어떤 남자아이가 나를 소개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으~쓱)


그렇게 연극이 끝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이 좋았다. 연기를 못하든 잘하든, 주인공이든 조연이든 상관없이 그 무대, 그 역할의 주인공은 나이고 그에 맞게 웃고, 떠들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자유를 온전히 느꼈음을 깨닫는 것이 설렜다. 특히 조용하고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내가 사람들 앞에서 익살스러운 분장을 하고 흥얼거리며 춤을 추고 관객 누군가와 눈을 맞추며 대사를 읊었다는 것이 대견스러웠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내가 전부가 아니란 걸 공표한 것만 같았다.


"이것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회사 내 벤치마킹 팀 선발 오디션 일정이 나오고 동료로부터 팀원 제의를 받아 발표자로 나가게 되었다.

제비 뽑기로 순번을 정한 후 내 앞순서 발표자가 발표를 마쳤다. 나는 한발 한발 나아가는데 긴장을 너무 많이 했는지 곁눈으로 보이는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슬로모션처럼 흐느적거려 보였고 앞에 있는 단상이 물결을 치는 것처럼 다가오는 것 같아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망했다! 생각이 미치는데 단상을 오르는 계단에 발을 올려놓는 순간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연극이야. 지금 나는 무대에 오르고 있는 거고, 역할은 발표를 누구보다 잘하는 전문직장인이고"


발표를 하는 동안 심사위원들을 관객이라 여기고 몇 명의 눈을 마주치고 웃으며 손짓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발표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오며 스무 살의 나에게 말을 건넸다.


"이십 년이 지나도, 나와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나를 또 찾았어!"


지금도 나는 가끔 무대에 오른다.

삶이라는 배경에 군데군데 솟아난 무대 위로 올라서는 나는 매번 긴장되고 떨리지만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첫 대사를 친다. 그것이 무슨 말이든 살아온 날들에게 배운, 가장 온당한 언어일 것이라 믿으며 새로 발견된 나에게 충실히 임하면서 말이다.


연극 동아리를 가입하게 된 큰 동기는 홍보 대자보에 쓰여있던 이 문구로 인한 것이었다.


"당신도 줄리엣이 될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도 그 비슷한 역할조차도 맡아본 적이 없다.

(속았어~~~)


덧붙임 (자랑이지만) 오디션은 1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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