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논이Noni Oct 11. 2022

제주도의 그림 같은 집 앞에서

소환된 십일 년 전 기억과 내가 노처녀인 이유 ft.직접 그린 집 그림

키 작은 귤나무들이 심어진

짧게 깎인 잔디밭 너머로 바다가 보이고,

그 에메랄드 빛 바다가 감싸고 있는 범섬이

호젓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호랑이 섬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 봅니다.


잘 있었냐고.

수백 번을 봐도 사랑스럽다고.


나무의자에 앉아 다정한 눈빛으로

고양이 바라보듯 범섬을 보며

짭조름한 바닷바람을 얼굴 한가득 쏘이다

토끼들이 사는 곳으로 발길을 떼어봅니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이곳에서 좋아하는 동물 고양이(범섬)와 토끼도 만날 수 있어 더없이 흐뭇합니다.


범섬이 멀리 보이는 풍경은 언제봐도 그림같아요. 늦게 핀 진달래와 어울리는 어느 흐린 5월의 큰고양이섬과 엉덩이가 귀여운 토끼들



토끼들과 실컷 놀다 (논다고 해봐야 혼자서 줄곧 토끼장 안 토끼 구경)

귤나무 밭 옆 돌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물이 없는 연못이 있습니다.

그 연못 안에서 인어와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상상을 잠시 해보다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숲 속의 작은 집이 보입니다.



이 작고 아담한 숲 속의 작은 집엔

누가 살고 있을까요?

저런 귀여운 집에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해졌습니다.


한참을 그림 같은 집 구경하다 곁에 피어있는 고 영롱히 맺힌 산딸기를 하나 따서 입에 넣어봅니다.


상큼한 딸기가 입안에서 터지며 순간 잊고 있던 뉴질랜드에서의 한 기억이 펼쳐졌습니다.



뉴질랜드에서 유황온천으로 유명한 로토루아 아트빌리지에서 입주 화가 프로그램에 뽑혀 그림 그릴 때 머물던 홈스테이의 호스트 마더였던 케이는 거의 매일 아침 정원 한 구석 자그마한 숲 속 같던 수풀 아래 앙증맞게 피어있던 딸기 몇 개를 따와 제게 건네주었습니다. 케이가 하도 오래 손에 꼬옥 쥐고 있어 살짝 뜨끈했던 딸기들은 그래도 맛있었고 케이의 따뜻한 마음이 딸기의 온기로 전해지는 것 같아 감사의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났어요.


 새끼손톱만 한 그 상큼한 딸기들이 너무나 귀엽고 작아서 꼭 요정의 딸기 같았는데 마침 케이의 별명 역시 요정 케이 Fairy Kay였어요. 키가 작고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살짝 불편해 뛸 수도 오래 걷지도 못하던 케이는 신체적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자원봉사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호숫가 쓰레기 줍기 등을 매일 실천하던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케이가 항상 쓰레기를 줍던 호수

케이는 제게 무척이나 친절했어요. 좋은 곳에 갈 땐 꼭 저를 차에 태워 동행하고, 친구들에게 저를 소개해주고, 어디든 함께 했습니다. 원래 친절하고 다정한 분이었지만 알고 보니 저를 자신의 며느리감으로 점찍어두고 있었던 것이었어요. 케이는 대놓고 제게 자기 아들과 결혼하라며 은근히 압박을 했지만 그 당시 호주에 남자 친구가 있던 저는 케이의 아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몇 년 후 케이의 아들은 박사학위를 따러 간 캐나다에서 멋진 여인을 만나 결혼하고 아들을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때 제가 케이의 바람대로 아드님과 결혼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내면이 성숙하고 아름답던 남자를 예전엔 알아보지 못했던 저는 어리석은 안목으로 늘 외모만 번지르르하거나 나쁜 남자만 쫓다 그 과보로 노처녀가 되어 현재 혼자 살고 있습니다.


케이가 데려다준 어느 뉴질랜드 예술인의 작업실 겸 전시관



노처녀의 정의 : 직역하면 늙은 처녀, 즉 나이 많은 미혼 여성을 뜻한다. 남성의 경우는 노총각이라 한다. 한국에서 노처녀, 노총각이란 표현이 상대방에게 실례되는 표현이듯이, 영미권에서도 spinster는 굉장히 무례한 표현이다. 중립적인 표현을 쓰고 싶다면 남녀 모두 single(미혼)이라고 지칭하는 게 좋다.


 

 어릴 땐 노처녀가 되는 게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라고만 생각했어요. 미디어에서 비치던 노처녀의 성격과 외모는 괴팍하고 히스테리컬 했으며 어딘가 하자 있는 중생으로만 보였고, 학교에서 나이 든 미혼의 여선생님 혼이라도 나면 '노처녀 히스테리 인가?' 하며 결혼 안 한 나이 있는 여성들을 깎아내리고 이상하게 여기던 당시의 말도 안 되는 문화에 저 역시 물들어 있었습니다.   


 노처녀가 제일 불쌍한 존재 같았어요. 그런데 제가 마흔 넘어 노처녀가 되고 나니 웬걸요! 살만한대요? 생각보다 재미있게 살고 있어 다행이에요. 어쩌면 미래의 독거노인 당첨일 수도 있지만 그런 걱정할 시간도 없이 제 나름대로 소소한 기쁨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좋은 책을 벗하며 자기 계발하고, 매일 명상 수행 실천하며 마음공부하고, 아름다운 올레길 산책하며 사색의 시간도 가지면서 자유로운 이 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어 감사합니다. 어쩌다 늙은 처녀가 되긴 했지만 비혼으로 영원히 살기로 한 건 아니고 언젠가 시절 인연이 닿아 좋은 상대가 나타나면 같이 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려면 마음이 늘 열려있어야겠죠? 백마 탄 왕자님도 이젠 잊어야 하고요. 어릴 때 순정만화를 하도 많이 봤더니 여전히 안소니와 테리우스 같은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폐해가 없지 않네요. 요즘은 차은우나 이준호가 백마 탄 왕자님들일까요?


 아이가 셋 있는 동생을 보면 체력적으로 피곤해도 순수하고 활기 넘치는 아이들의 기운으로 마냥 좋아 보입니다. 예쁜 아이들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바쁘면서도 아이들이 내뿜는 밝고 아름다운 에너지로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어 가끔 부럽기도 하지만 이런 독거 노처녀의 인생도 나름 좋은 점이 많아 만족하며 살아가고 또 남과 비교하지 않으며 살아가려 합니다. 남과 계속 비교하다 보면 불행해지니까요. 그 대신 과거의 자신과 비교하며 사는 게 필요합니다. 십 년 전의 나보다, 작년의 나보다 성장하고 지금 더 나아진 삶을 살고 있다면 행복한 인생입니다.


 혼자 사는 게 편하고 좋지만 가끔씩 허전하고 심심할 땐 나도 결혼할걸 그랬나? 하다가도 결혼해서 진정으로 행복하게 사는 커플을 동생 부부 빼고 본적이 별로 없기에 결혼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기기도 합니다. 저 같은 성질머리에 부부싸움은 예사였겠죠. 이 작은 몸뚱이 하나 간수하기도 힘든 약골인 제게 줄줄이 딸린 식구가 있었으면 매일매일 피곤에 절어 만성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살았을 게 분명해요. 그리고 만약에 제가 결혼을 했더라면 해외에서 10년 넘게 떠돌며 그림 그리고, 전시하고, 공부하고, 일하고, 자원봉사하고 여행하며 사는 자유로운 영혼의 삶을 경험하지 못했을 거예요.



 당신의 인생 여정에서 자신보다 수준이 높거나, 적어도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좋은 사람과 만나지 못한다면 차라리 혼자 사는 편이 낫다. 성격이 나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당신의 마음도 그 사람의 마음을 무의식적으로 모방하게 되고 나쁜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런 사람과는 함께 길을 걸어가면서 서로가 수준을 높여주는 우정을 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법구경>61편



 그런데 사람이라는 동물은 욕심이 많아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끊임없이 갈구한다죠. 결혼 안 해본 사람은 결혼하고 싶어 하고, 해본 사람은 안 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결혼한 이들은 결혼해서 괴로운 것보다 외로운 게 낫다고 하지만 결혼 안 한 이들은 지루한 천국보다 즐거운 지옥이 낫다고도 합니다. 어느 편이 나을까요?


 어머니는 생전에 제게 항상 일체유심조를 되새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사 모든 것이 다 내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하셨죠. 문제는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상념의 차이라고 합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이루는 말로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라는 뜻이다. 유식(唯識)에서는 일수 사견이라는 비유를 든다. 우리는 행복과 불행은 상황에 따라 또는 환경에 따라온다고 생각하는데 매우 큰 착각이다. 행복과 불행은 마음에서 지어내는 것. 그 누구도 날 행복하게 할 수 없고 불행하게도 할 수 없다.




자연이 선물해준 황홀한 맛과 향을 지닌 서귀포 야생 산딸기


 자연을 사랑하고 늘 남을 돕던

이타적인 요정 케이가 건네준 딸기맛은

제주도에서 처음 맛본 산딸기의 맛과

정확히 일치했고, 

혀의 감각을 통해

행복했던 뉴질랜드에서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십 년 전 기억을 소환해준 산딸기에게 고맙습니다.




 이곳은 제가 제주도에서 가장 좋아하는 조용한 장소들 중 한 곳입니다.


제주도 1년 살이를 시작한 작년 겨울,

긴 산책에 나섰다 그저 발길 닿는 곳으로 걸으며

발견한 이곳은

아름다운 풍광과 잘 관리된 정원을

자랑하는 휴양지이지만 인적이 드물어

혼자 있는 걸 즐기는 제게 마치 천국 같은 공간으로 다가왔습니다.

산딸기를 따먹고 사진을 찍은 때는 서너 달 전 초여름의 어느 하루입니다.


오일파스텔로 그리기 시작한 제주도의 그림 같은 집입니다.
드디어 완성. 노니 그림 2022
제주도의 풍경을 오일파스텔로 그려 보았어요.


원래는 꽃그림 전문입니다♡



♡더 많은 그림을 노니의 인스타에서 만나세요♡

https://www.instagram.com/nonichoiar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