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수저 색이 달랐더라면 혹시 더 잘되었을까
부모가 열심히 일군 한 가정의 경제력에 대하여 수저 색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금수저, 흙수저라는 단어는 요즘 정말로 흔히 사용하는 용어이자 가장 노골적이며 직설적인 부모님의 경제력에 대한 표현법이라, 불편함을 무릅쓰고 우울의 주제어로 삼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여전히 불편함이 자리 잡는다. 만약 내가 부모가 되어 나의 자녀들이 장성하였을 때 금수저, 흙수저라는 단어에 대해 듣는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자녀들도 처음부터 함부로 자신의 부모님의 재력을 탓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내게 서러움을 안겨주는 순간ㅡ특히 출발선이 달라 무언가 박탈감을 느끼게 되었을 때ㅡ 비로소 나의 수저 색을 돌아보게 되는데, 이때 부모가 극도의 무심함으로 자녀의 경제적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다른 자녀와의 비교를 시작한다면 자녀들도 방어적 자세를, 아니, 방어를 넘어선 공격 태세를 갖출 수밖에 없다. 어른들만 지인들의 삶을 엿보고 비교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녀들 또한 어릴 때부터 각자 자신이 속한 나름의 집단에서 사회성을 기르며 여러 친구들의 삶을 엿본다. 부모의 수저 색에 대한 인지는 어린 시절을 지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뚜렷해진다. 그렇기에 사실 부모들은 자녀들을 공격 태세로 만드는 ‘자녀 비교’를 당장 멈추어야 한다. 부모가 옆집 철수는 서울대에 들어갔다고 자녀를 탓할 때, 자녀는 옆집 철수의 아버지가 기업의 사장님이며 철수가 그간 고급 사교육을 통해 얼마나 편하게 성적을 관리하였는지 떠올릴 수도 있다. 부모가 옆집 영희는 의사 남편에게 시집을 갔다며 아직 미혼인 딸에게 눈치를 주었을 때, 자녀는 영희가 풍족한 용돈을 받아가며 대학생활을 보내는 동안 하이클래스 모임의 친구들과 친해졌고, 거기서 알게 된 의사 오빠와 연애를 하였으며, 결혼 전 아버지가 그 의사에게 개원 비용을 다 대어주겠노라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부모와 자녀 간의 상처만 남는 전쟁의 서막이다. 부모도 한때 누군가의 자녀인 적이 있었을 텐데 왜 그것을 모르는 걸까. 아마도 입장이 바뀌게 되니 새까맣게 잊어버리신 걸지도 모른다.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녀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초등학교, 중학교까지는 친구들 간에 ‘부자’에 대해 인식할 일이 별로 없었다. 요즘 어린이들은 예전에 비해 조금 빨라졌다고도 하지만, 지금 30대인 나에게만 해도 어릴 적에는 학생이 소지하고 다닐 전자기기도 별로 없었고, 친구들과는 놀이터나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기억이 더 많다. 청소년기에는 교복을 입고 다녔던 덕분에 모든 아이들이 비슷비슷하게 보였다. 내 옆의 친구가 부자인지 별로 관심도 없었고, 부자라고 해도 함께 어울려 다님에 크게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20대가 되면서부터 부모의 경제력 차이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20대가 된 것은 서양권과 다르게 경제적인 독립과는 정말 거리가 멀다. (사실 서양에서는 살아본 적이 없어서 서양의 사정은 잘 모르겠다.) 모두가 대학교까지는 졸업해야 하는 이상한 문화가 자리 잡히는 바람에, 대학 졸업 때까지도 말만 성인이지 그저 부모의 슬하에서 움직이는 ‘학생’의 연장선일 뿐이다. 어린 성인들이 이렇게 단체로 가방끈이 길어지면서, 전반적으로 사회인이 되는 시기가 늦어졌다. 요즘에는 25살이라고 해도 사회적으로 독립적인 행동과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 아직 어린 학생 같은 사람이 많다. 솔직히 말하자면 고등학생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바로 그 시기인 20살에서 25살까지, 조금 더 길게는 30살까지도 부모님의 재력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아니, 어쩌면 결혼과 내 집 마련까지 생각하여 30대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어쩌다 보니 두 개의 전공을 졸업하는 바람에 총 8년의 대학생활을 했다. 그리고 대학 입학과 동시에 거의 모든 용돈 벌이는 스스로 했다. 아주 특별한 돈이 드는 경우를 제외하고 부모님께 생활비 등을 달라고 말씀드리는 경우가 없었다. 20살 초반에는 성인이 되었다는 설렘에 용돈벌이 조차도 즐겁게 느꼈다. 물론 덕분에 대학교 생활이 아주 빡빡하게 돌아가긴 했지만 말이다. 내 중간고사가 코앞인데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내 공부는 하지 못하고 과외를 하러 다닐 때면 어쩔 수 없이 잠을 줄여 건강을 축내어 공부를 했다. 그러면서도 친구들과 노는 자리도 최대한 빠지지 않으려 애썼다. 적응이 되고 나니 그저 일상적인 스케줄이 되어버렸을 뿐이었기 때문에 크게 서럽지도 않았다. 가끔 친구들이 이런 나에게 어떤 존경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친구들에게 그런 칭찬을 들으면 스스로도 조금 으쓱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나는 몸과 마음이 곪아가고 있음에도 긍정적인 마음 가짐을 다져가며 스스로 괜찮은 줄만 알았다.
육체적, 정신적 피로는 눈에 보이지 않게 차곡차곡 잘도 쌓여갔다. 육체적 피로라 함은 예를 들어 중고등학생 때는 한 번도 수업시간에 졸지 않던 내가 대학생이 되니 수업시간에 노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졸게 되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이동하면 잠자느라 고개를 거의 가누지 못하는 등으로 나타났다. 늘 돈이 부족한 느낌이 드니 식사 때는 최대한 값싸고 배부른 쓰레기 같은 음식들을 말 그대로 ‘배를 채우는 목적’으로 먹는 날이 많았다. 특히 대학생은 저녁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으니 끼니는 이동시간에 대충 때우는 날이 수두룩했다.
정신적 피로는 더욱더 힘겨웠다. 직장인이 된 지금도 느끼지만, 정말 남의 돈을 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일 자체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도 굉장했다. 특히 나는 학구열이 강하기로 유명한 강남의 대치동에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에 드센(?) 아줌마들을 많이 만났다. 나를 선생으로 쟁탈하고자 하는 아줌마들의 싸움에 휘말린 적도 있었다. 수업 마치고 매번 전화로 컴플레인을 하는 아줌마도 있었다. “왜 집에 들어왔는데 안방 문을 열고 내게 인사를 하지 않았냐”, “아이가 화장실을 자주 갔는데 야박하게 수업시간을 딱 맞춰서 끝내냐” 등등. 생각지도 못한 요구사항들을 늘어놓으며 신경질을 낼 때면 정말 돈을 봐서 겨우 참았다.
또한, 자기 계발을 1순위로 둘 수 없다는 것도 정신적 피로를 불러왔다. 다음 진로를 준비하는 대학교 고학년 학생에게는 이것이 무척이나 서러운 일이다. 다른 친구들은 저마다 다음 진로를 위해 자기 계발(시험, 자격증 등 소위 스펙이라 불리는 것들)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친구들은 대학교 옆에서 자취해가며 원하는 진로를 차지하기 위한 자격증 준비 비용을 부모님께 지원받는다. (그리고 그 와중에 유럽여행을 한 달씩 다녀오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적 상황이 넉넉하지 못한 대학생에게는 모든 선택에 ‘가성비’가 따라붙는다.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에서도 가성비를 따지고 있는 판에 미래를 위한 투자에다 돈을 아낌없이 쓸 리가 없었다. 나는 내가 준비하는 시험과 관련하여 가장 좋은 학원 강의를 발견하였다 하더라도 그 가격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은 교재를 새로 사서 보기보다 썼던 교재를 지워가며 2~3번 돌려봐야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책을 사서 보는 것이 너무 돈이 아까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독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돈을 안정적으로 버는 직장인이 되고 나서 내 삶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나는 독서하기를 좋아하고, 특히 마음에 드는 구절이 담긴 책은 아낌없이 사서 본다는 점이었다. 시간과 돈이 생기고 나니 가장 먼저 취미에 독서가 들어왔다. 과연 환경이 사람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작게나마 체험을 해본 기분이었다. 나보다 더 불우한 학생들 중에서는 얼마나 수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역량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공부와 멀어졌을지 생각해보게 됐다. 나는 종종 대학생 때 교양 수업에서 배웠던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을 떠올린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은 인간의 욕구를 5가지 단계로 나누고, 하위 단계의 욕구가 충족이 되어야 다음 단계의 욕구에 대한 열망이 생긴다는 이론이다. 대학생의 나는 1단계(생리적 욕구), 2단계(안정의 욕구)에서만 머무르는 중이었다. 그 가장 꼭대기 5단계에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
수업을 들으며, 무심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5단계 이론을 설명하는 피라미드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지난 23살의 내가 생각난다.
‘나도 언젠가 자아실현의 욕구를 느끼게 될 날이 올까?’
생활비 스트레스에 대하여 한번 우울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 각종 불만들이 뒤이어 생겨나기 시작한다. 작은 일이 꼬여도ㅡ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하고 큰일이 꼬인다면 더더욱 상황으로 그 탓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이를테면 ‘나도 만약 경제적으로 강한 지원을 받았더라면 저 친구처럼 시험에 빨리 합격했을 텐데’와 같은 생각 말이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사실 부잣집 친구들도 같은 시험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그 합격한 친구가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여 자신의 성공을 거머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만약 금수저 집안에 태어났더라도 나의 노력이 부족하여 그 시험에서 떨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라는 게 외부에서 요인이 보이는데도 그것을 외면하며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려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실제로 외부요인이 영향을 크게 미치기는 것도 사실이니까 완전히 자기 합리화는 아니기도 하다. 나 스스로는 바꿀 수도 없는 현실이 아주 강력한 자기 합리화 수단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강력한 우울의 원인이 또 있을까. 씩씩하던 나도 대학교 4학년쯤 되니 옆자리 금수저 친구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편하게 공부만 하고 싶다.’, ‘그냥 현상태를 유지하며 살기만 해도 피곤하다.’라는 생각이 자꾸만 올라왔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때 아버지는 다니시던 기업을 퇴직하시게 되었다. 갑작스레 돈이 들 일이 생기면 그래도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궁지에 몰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당시 나에게 있어 큰돈이란 고작 30만 원 안팎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정말이지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용돈을 쥐어주러 다녀오고 싶다.
다행히 나는 졸업 후 다음 진로를 위해 치른 약학대학 입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고 경쟁률이 높은 학교에 무사히 합격했다. 시험 준비는 정말이지 치열하고도, 가성비 높게 성공적으로 마쳤다. 정말 궁색하고도 기특한 학생의 모습이었다. 합격을 했으니 이제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었던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오히려 입학을 한 이후에 더 빈번히 경제적인 괴로움과 마주했다는 점이다. 입학해보니, 서울권에서 대학교를 다니며 이 시험을 준비했던 대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정말 많은 합격생들이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학원가 종합반에서 정해져 있는 스케줄대로 공부를 하고 이 시험에 합격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유명한 학원들이 정해져 있다 보니 입학 후에 서로가 안면이 있어 서로를 알아보는 지경이다. 마치 학원가는 상위 성적을 받은 합격생들의 예비학교 같았다. 입학 후에도 서로 “너는 어디 학원에서 공부했어?”라는 질문은 흔하디 흔한 질문이었다. 나는 이런 대화를 통해 내가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시험 준비를 했는지, 그리고 다행히도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뿌듯함도 잠시, 약대 생활 또한 정말 힘들었다. 생각보다 공부량이 너무 많았고, 동기들은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 한 번은 열심히 공부한 과목의 중간고사에서 밑바닥을 쳤다.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성적이 바닥을 치다니, 내겐 처음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다른 데서 낭비하는 시간을 줄여 공부시간을 늘려보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사실 나는 별로 낭비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우선 통학이 왕복으로 3시간, 과외 아르바이트가 주 3회로 2시간씩, 그리고 과외 준비에 드는 시간들을 제외하면 내게 남은 시간은 분명 공부에 대부분 썼다. 그렇게 생각하니 통학과 과외 아르바이트가 너무너무 싫어지기 시작했다. 이것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못하고 방해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분노에 휩싸일 때도 많았다. 자취는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통학에 대한 부분은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했고, 그나마 해결책으로써 과외를 줄여 여유시간을 확보하고 대신 줄어든 수입에 대처하기 위해 학자금 대출로 생활비 대출을 받고, 지출을 아껴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학자금 대출에서 나오는 생활비 최대 금액도 한 달로 나누어 계산하면 30만 원 남짓 밖에는 되지 않았다. 게다가 서울 한복판 대학교를 다니며 지출을 아끼기란 쉽지 않았다.
동기들(즉, 이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학생들)은 경제적으로 넉넉하거나, 넉넉하지 까진 않아도 꽤 탄탄한 경우가 많아 보였다. 다들 그렇게까지 생활비 걱정을 하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아마 몇몇은 나와 같은 심정이었지만 겉으로는 표시를 내지 않으려 애써서 서로가 못 알아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나는 내가 얼마나 남다르게 이 집단에 끼어들어왔는지에 대한 자부심과 동시에, 이 집단에 적응하기 위한 괴로움이 번갈아 올라왔다.
지출을 아끼던 때에는 점심시간마다 스트레스를 받았다. 다 같이 밥을 먹으러 갈 때, 혼자서 반대하며 더 싼 것을 먹자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어느 날은 시험 기간 중에 참 힘들었던 과목의 시험이 끝나고 나서, ‘우리 모두 고생하는 중이니 오늘 점심은 파스타를 먹으러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다 같이 동의하며 즐겁게 파스타집으로 향했지만 나는 “난 시험을 망쳐서 파스타 먹을 자격이 없어!”라고 말하며 농담처럼 던지고 그 점심식사에서 빠졌다. 사실 나도 파스타가 먹고 싶었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점심 값으로 쓰기에는 파스타는 너무 비쌀 것이 뻔하여 부담스러웠을 뿐이다. 아마 누군가는 ‘쟤 진짜 시험에 예민한 애네.’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날은 비싼 것을 먹으러 가기에 나는 속이 안 좋다고 거짓말을 하고 점심시간에 모임에서 빠졌다. 고픈 배를 채우려고 편의점에 가서 삶은 계란을 사 먹었다. 삶은 계란은 값도 싸고 영양만점의 건강한 음식이라고 씩씩하게 생각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서러워 목이 메었다.
우리 학교에는 약대 내 동아리가 많았는데, 돈과 시간을 많이 뺏는 동아리를 제외하니 별로 하고 싶은 동아리가 없었다. 나도 오케스트라 동아리가 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강료나 악기값을 생각하니, 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이런저런 생활에서 자꾸 빠지다 보니 동기들과 공유하는 부분이 적었다. 자연스레 나는 아는 친구가 적어졌다. 특히나 여대라, 유대관계에 있어서 서로 간의 공통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쉬운 대학생활이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아마 주변 친구들은 내가 이렇게 지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거다. 왜냐하면 나는 집값이 비싸 살기 좋기로 유명한 동네에 살았기 때문이다. 부모님께서 노력하여 일군 경제력의 끝에 얻어진 좋은 동네의 좋은 집. 그러나 당시 우리 집은 아버지는 퇴직하시고 학생은 셋이었다. 그 안에 살던 나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전혀 넉넉하지 못하였다. 이렇듯 겉에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어떻게 출발선이 다른 학생들의 성적만을 보고 서열을 매길 수가 있겠는가? 열악한 조건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서 A를 받은 대학생과 B를 받은 대학생이 누가 우수했는지 감히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그러나 현실에서 취업시장에서 지원자의 스펙은 오직 결과로만 판단된다. 이 노력은 모두 보이지 않고 매겨지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듯이, 이러한 경험은 나를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생활이 무엇인지 배우게 했지만, 후에 만성피로, 우울감, 그리고 더 나아가 나중에는 보상심리라는 부작용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가 “학생 때가 좋았지~. 다시 돌아가고 싶다.”라고 말하면 주변에서 다들 맞장구를 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용히 외롭게 친구들과 거리감을 느낀다. 나는 다시는 돈 없이 공부하던 대학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신분 자체에 의해 저절로 돈이 벌리고, (직장인은 일상을 지내면 절로 돈이 생기지만, 학생 때는 추가로 다른 생활을 해야 했으므로.) 좀 더 건강한 음식을 먹고, 원하는 것을 사고, 원하는 취미활동을 할 수 있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
얼마 전 영화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던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에서 그런 대사가 나와 유명해진 적이 있다.
“ 부잣집은 또 애들이 구김살이 없어. 다리미야, 다리미. 돈이 다리미라고. 구김살을 쫙 펴줘.”
그 말을 듣는데 온 몸과 기분이 서늘해졌다.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의 구김살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무서운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가끔은 유복한 집안에서 편안히 자라온 친구(물론 그 친구도 자기 자신의 삶에 열정을 가지고 노력한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이건 좀 다른 이야기니까 ‘편안’하였다고 표현하였다.)를 보면 상대적 박탈감과 우울감은 현재의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내가 저랬더라면 나는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미 없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그 모든 생활을 청산했지만, 구김살과 우울감은 지금의 내게 여전히 남겨진 숙제이다.
나와 비슷한 수험생활 중인 20대들에게.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우울감을 겪고 있는 대학생에게 나의 눈물겨운 수험생활과 합격의 이야기가 희망과 위로가 될 것 같아 나의 합격 사례를 적어본다. 왜냐하면 솔직히 요즘은 빈부격차에 따라 좋은 학벌을 갖는 경우가 많다. 상위권 대학 학생일수록 어려운 사정의 사람이 정말 많이 없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시험 2주 전까지 과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월급이 들어오면 그중 절반은 바로 매달 다니는 독서실 이용료와 교재 등 기타 비용으로 집어넣었다. 비용과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시험 준비는 모두 인터넷 강의(이하 인강)를 이용했고, 실강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솔직히 한번 정도는 이론 정립을 위해 인강을 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초기에 방향을 잘 잡아야 수험생활을 단축할 수 있으니 잘 이용하면 절때 아까운 비용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은 강의를 쭉 듣고, 그 이후에는 불필요하게 동일한 범위에 대한 추가적인 강의는 듣지 않았다. 대신 이전에 들었던 강의의 필기를 그대로 다시 복습했다. “인강은 집중이 잘 안된다.”, “인강은 스케줄 관리가 잘 안되니 밀린다.”는 말은 모두 핑계이고 사치였다. 과목마다 인강을 신청하면 돈이 꽤 많이 들기 때문에, 주변 지인들 중에 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를 찾아다니며 강의를 함께 듣기로 했다. 아는 선배가 자기는 주로 아침시간에는 인강을 잘 시청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러면 나는 9시 이전에 인강을 이용해도 되겠냐고 물어봤다. 선배는 그 시간은 자기가 자는 시간이라며 흔쾌히 아이디를 빌려줬지만, 나는 또 공짜로는 하기 싫은 자존심에 비용을 약간 지불했다. 어쨌든 나에게는 정말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었다. “그 사람보다 아침 일찍 인강을 보는 게 힘들다” 는 말은 역시 사치였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의학전문대학원 입시인 MEET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아 특강반이 열렸다. 나에게는 아주 큰 행운이었다. 범위는 나랑 조금 달랐지만 이론을 배우기에는 내용이 충분히 많이 겹쳤다. 두 시험 모두 일반생물학, 일반화학, 일반물리학 등 ‘일반’으로 표현되는 순수과학을 시험 범위로 두었기 때문이다. 대신 경쟁률이 있다 보니 그 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체 시험에 통과하여 특정 순위 안에 들어야 했다. 나는 그 반에 들어가야만 해서 정말로 열심히 시험 준비를 했다. “내가 치를 시험이랑 범위가 좀 달라.” 등의 말도 역시 사치였다.
유명한 학원들에서는 자체적으로 모의고사를 실시했다. 나는 모의고사를 한 번도 치지 않았다. 본시험도 아닌 주제에 모의고사 비용이 내게는 너무 비쌌다. 대신, 남들은 다 연습해보는데 나는 연습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혼자 시뮬레이션을 많이 돌려봤다. 타이머를 놓고 실제 시험장처럼 독서실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기출문제로 시험을 쳐보았다. 거의 수능시험날이랑 비슷한 스케줄이기 때문에 혼자서 이런 것을 시행해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그러나 “혼자서 해보기는 어렵다”는 말도 역시 사치였다.
모든 단계를 마치면 이제 공인 영어시험 성적을 준비하는 기간이 온다. 나는 20대 초반에 유명한 토익 학원에서 홀수달, 짝수 달 강의를 한 번씩 총 두 달을 들은 적이 있다. 앞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시험에 대한 감을 잡는 용으로 첫 투자는 과감히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후로 10년동안 단 한번도 토익학원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토익으로 유명한 학원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가보면 ‘세 달 만에 900점 달성!’ 등과 같은 제목의 인기글이 있다. 먼저 고득점을 경험하신 토익 선배님들이 친절히 도 본인의 성공담을 상세하게 적어놓았다. 나는 그 게시판에서 각종 꿀팁들만을 거의 정통 학문 공부하듯이 팠다(?). 성공 사례들을 분석하는 일은 내게 희망이 되기도 했고, 학원에 더 이상 돈을 투자할 수 없는 나의 선생님이 되기도 했다. 파랭이 책은 2년마다 다시 꺼내어 재사용했고, 기출문제집은 시험 시간 관리 스킬을 익히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새 것으로 샀다. 대신 리스닝의 경우 어차피 한번 듣고 답이 외워지는 종류도 아니기 때문에 연필로 최대한 적게 표시해두었다가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나면 연필선들을 지우고 다시 새 시험지 보듯 재사용했다. 외국어에 대한 특별한 경력(이를 테면 어학연수, 외국 유학 등) 없는 평범한 한국식 외국어 교육을 받은 학생인 나도 이렇게 매번 토익시험에서 900점을 달성했다. 물론 한 번에 고득점을 달성하지는 못했고, 2년마다 성적을 갱신하는 때마다 3~4번 정도는 연달아 쳤던 것 같다. 대신 시험 치는 비용이 아까우니 매 시험은 정말 큰 시험 치르듯 이를 갈고 준비하고 쳤다. 토익시험을 준비해본 사람들은 토익 시험을 이런 자세로 치르는 게 생각보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것이다. 매달 시험이 있다 보니, 준비도 똑바로 안 하고 참석에 의의를 두는 경우도 허다하다. 20대 내내 2년마다 토익시험 성적을 갱신했고, 그때마다 900점을 달성하고 떠났다. 토익시험만큼은 내가 가성비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다. 돈이 부족한 학생이라면 내가 한 방법들을 믿음을 가지고 꼭 해보았으면 좋겠다.
쓰다 보니 ‘라떼는 말이야’를 외치는 꼰대 같아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 내가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건 내 무용담이 아니라, “불편한 것을 모두 감수하고 이렇게 해도 합격한 사례가 있다.”는 사실과 희망이다. 전례가 있으면 내 행동에 대한 의심도 거두어지는 좋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 전례를 하나 보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나는 안다. “남들은 다 저렇게 하는데, 나 혼자 이렇게 한다고 과연 될까..?”라는 생각을 물리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중간중간에 ‘사치’라는 단어를 넣어 쓴 생각들은 사실 모두 내가 실제로 했던 생각들이고, 그 사실들이 매우 불안했으며, 머릿속에서 잊어버리려 애를 썼던 말들이다. 이 말들을 품고 있으면 우울감만 심해질 뿐이지 실질적으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럴 때는 스스로 다음을 다잡고 외부 상황은 그대로 인정하되, 그 안에서 긍정의 힘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마인드 컨트롤은 어려운 일이지만 할 수 있다. 남들보다 고생하니 구김살은 조금 남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그나마 지금 처한 상황에서 나의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