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8일 토요일은 두고두고 추억할 성장의 날이다. 한라산 정상을 하지만 좀처럼 보기 어렵다는 백록담을 보았기 때문이다.
같은 아파트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의 이웃 동네로 이사는 했지만 여전히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요 동생이 있다. 두 사람은 첫째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아이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계절 따라 여행도 가고 주기적으로 만나 밥을 먹었던 가족 같은 사이다.
아이들 수능치고 배낭여행 보내자며 조금씩 모았던 회비가 있다. 어느 순간 아이들은 가족보다 또래가 좋아지는 나이가 되었고, 처한 환경이 다르다 보니 함께할 수 있는 날도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이들보다 우리 엄마들을 위해 사용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의견 일치를 봤다. 그렇게 세 엄마는 틈틈이 밥도 먹고 가끔씩은 1박 2일 일정으로 여행도 다녔다. 소소한 행복이었다.
이번 제주도 한라산은 당초 다른 곳을 정했지만 자리가 나질 않아 급하게 바꾼 장소다. 수능치고 세 모자끼리 또 가족끼리 몇 번 다녀온 적은 있지만 한라산 등산은 이번이 처음이다. "언니야, 한라산 가려면 운동 좀 해야 된 대이." 그때까지만 해도 한라산이 얼마나 높은지 찾아볼 생각도 않았다. 막내의 추진력으로 숙소며 장비 대여며 이것저것 정보가 속속 올라왔다.
운동을 안 한 지 오래지만 오르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한라산 간다는 말에 남편이 엄청 힘들어서 못 올라갈 수도 있다고 했다. 한 해 두 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건강을 위한 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고, 해마다 목록에 넣었지만 늘 뒷전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남편이 택배 박스를 열어 소형 운동기구 스텝박스를 보여준다. 운동하려고 샀다는데 거기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걸 굳이 살 필요가 있냐고, 아파트 계단 오르내리면 되고, 동네를 걸어도 되는데 짐스럽게 굳이 이걸 사냐고 타박 아닌 타박을 했었다.
운동해야 한다고 꼭 할 거라며 반박 아닌 반박을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몇 번 하지 않고 구석에 박혀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한다는 생각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아깝다는 생각에 나라도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10분을 맞추고 걷기 시작했다. 10분을 했는데도 몸에 열기가 느껴졌다. 제대로 된 운동은 못하더라도 이거라도 꾸준히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인증을 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와의 약속이다. 강력한 환경설정이다. 그날부터 SNS를 통해 인증을 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 가지고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남편 덕분에 그렇게 미루던 운동을 작게나마 실천으로 옮길 수 있어 감사했다.
여행 전날, 카페 일을 마치고 평소보다 늦은 12시가 다 된 시각에 들어왔다. 밥을 먹는 식탁 옆자리에 가방이 보였다. 뭐냐고 물으며 보려는 나를 두고 가방을 이리저리 옮기며 끝내 보여주질 않았다. 서재 방에 있는데 안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지퍼백 3개를 들고 온다. 가면서 먹으라고 했다. 그제야 알았다. 제주 가서 먹으라고 이것저것 챙긴 간식꾸러미였다.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마음 씀이 너무 고마웠다. 그러더니 이번엔 봉투를 내민다. 같이 맛있는 거 사 먹으란다. 봉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2003년생 아들들 키우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름다운 제주에서 세 분의 힐링여행을 응원합니다." 뭉클했다. 세심한 마음 씀에 감동이 밀려왔다.
사진을 찍어 여행 단톡에 올렸다. 2003년생 아들들이라는 표현에서 가슴이 뭉클하다며 감동이라는 답글이 올라왔다. 이튿날 공항으로 이동 중 전화가 울린다. 남편이었다. 스피커를 눌렀다. 두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너무 감동이라며 감사 인사를 쏟아냈다.
그렇게 남편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스텝박스 23일째로 생긴 약간의 체력에 마음 담긴 간식으로 에너지를 올린 17일 늦은 오후, 셋은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 오른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제주에 도착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바람까지 불어 스산하기까지 했다. 내일은 맑다는 일기예보에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무지개 렌터카를 통해 렌트를 하고 아이젠과 스틱 대여를 위해 오쉐어에 들렀다. 상호가 똑떨어진다. 오쉐어가 오세요로 들렸고 직원분도 친절했다. 식사 장소로 이동하며 오쉐어, 오쉐어 노래를 부르는 후배의 과한 발음을 함께 따라 하며 얼마를 웃었는지 모른다. 웃음을 준 오쉐어에 감사하다. 웃음을 만든 후배에게 또 감사하다.
식당에 도착했다. 대기 손님이 많았다. 밖에서 기다리다 비바람으로 인한 한기에 대기실로 들어왔다. 20여 분 기다렸을까 자리가 났다. 식당 내부는 꽤나 넓었다. 현지인인지 여행객인지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에 술잔 부딪치는 소리, 하하 호호 웃는 소리까지 제대로 된 불금을 즐기는듯했다. 배가 고프던 차에 허겁지겁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배가 부르다면서도 추가로 계란찜을 시켰다. 알이 듬뿍 올려진 톡톡 터지는 담백한 계란찜까지 먹고는 일어섰다.
호텔 난타, 숙소에 도착했다. 한라산 등반을 앞둔 숙박객이 많다는 소문처럼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속속 들어선다. 들어오면서 식당에서 주문하고 픽업한 김밥에 후배가 챙겨 온 오이, 간식 등을 나눠 담고는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새벽 기상 인증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하나 둘 일어난다. 6시가 안 된 시각, 숙소를 나섰다.
한라산 입구 대기실에는 스틱 길이를 조정하고 스트레칭으로 몸을 푸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날씨가 꽤나 차갑다. 한겨울을 방불케 하는 날씨에 경량 패딩을 챙겨 입고 워머에 주머니에 쏙, 핫팩까지 챙기고는 출발이다. 오전 7시다.
차갑지만 기분 좋은 공기와 활기찬 사람들의 표정에 에너지를 올리며 힐링여행이 시작되었다.
대피소 2개 중 첫 번째 속밭 대피소에 들렀다. 군데군데 바닥이 얼어 엉거주춤 걸음에 미끄러지는 이도 여럿이었다. 볼일에 잠시 휴식하고 출발이다. 12시 30분 진달래 대피소 통과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길에 우리네 인생이 담긴듯했다. 울퉁불퉁 돌길이었다가 움푹 팬 물웅덩이였다가 눈길이었다가 빙판길이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락 흙 밟는 소리가 정겨운 평평한 길까지 시시각각 변화무쌍했다
잠시 쉬는 동안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뭇가지 몽글몽글 내려앉은 저건 뭐지, 줌인했다. 파란 하늘에 붉은 열매가 너무나 예뻤다. 탐스러웠다. 감탄사가 절로 났다. 옆에서 얘기한다. 한라산에서만 볼 수 있는 겨우살이란다. 언젠가 겨우살이는 특정 환자들에게 좋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저걸 두고 하는 걸까? 군데군데 보이는 겨우살이가 신기했다.
사라 오름을 지나자 경사에 미끄럽기 시작했고 도중에 아이젠을 장착했다. 무게감은 있지만 한결 수월했다. 도구, 장비의 힘이다. 봄이라는 생각에 스틱도 필요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는데 나름 산을 많이 오른 친구의 장비와 복장 조언 덕분에 가뿐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운동화를 신고 앞서간 몇몇은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가는 모습도 보였다. 안타까웠다.
그 유명한 진달래밭 대피소다. 점심을 챙기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틈틈이 간식을 먹으며 올라온지라 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먹고 가기로 했다. 저 멀리 정상이 보인다. 챙겨간 컵라면에 김밥, 커피에 구운 계란까지 많이도 먹었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코스다 보니 진달래밭 대피소를 12시 30분에 통과해야 한다는 말을 미리 들었지만, 점심을 먹는 도중에도 방송이 계속된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드러나는 하늘에 상쾌한 바람이 더해 감탄사가 절로 났다. 사진에 모두 담을 수 없음이 아쉬웠다.
드디어, 드디어 오른 정상이다. 사진으로만 보던 백록담이 눈앞에 펼쳐진다. 두 번씩이나 왔었지만 운무로 백록담을 처음 본다는 친구는 안다시피 하며 떠날 줄 몰랐다. 감동이라며 감탄사 연발이다. 자연의 신비가 경이로웠다.
올라온 길, 산 아래 펼쳐지는 장관에 힘듦이 싹 가시는듯했다. 경치도 공기도 이보다 더할 순 없다. 상쾌함의 진수였다.
대견함에 이리 찍고 저리 찍고, 오늘 이곳만큼은 인물사진도 남기고 싶다.
오른쪽 백록담 정상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담으려는 행렬이 끝이 없다. 우리 앞서 몇 이 있고 우리 뒤로도 꼬리를 물고 있는데 2시에는 하산해야 안전하다는 방송이 계속된다. 서둘렀다.
카메라에 눈에 마음에 듬뿍 담고는, 백록담 공기를 한껏 들이켠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백록담을 나선다.
내려오는 길, 오랜만에 신은 등산화라 그런지 새끼발가락과 발목 부분에 통증이 있다. 발바닥은 땅에 붙은듯했다. 등산화 끈을 풀었다 조였다 몇 번이나 반복했다. 동료라 같이 가는 게 아니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었다. 어느 순간 조용하니 앞서가는 사람들이 멀어지고 어둑해지면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뛰었다. 이내 사람들이 보인다. 내려오며 알았다. 구급함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내려오며 알았다. 이 길을 어떻게 올라갔을까 하고 말이다. 다리는 아팠지만 생각보다 힘들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게 신기했다.
하산해서 찍은 인증숏에는 오후 6시 44분이다. 11시간 30여 분에 가까운 시간을 한라산과 함께했다. 시간은 오래지만 한라산 맑은 공기와 정상에의 뿌듯함이 힘듦을 이겼나 보다. 하산 후 후배가 시계를 보여준다 "언니야 우리 43 천보 가까이 걸었네..." 평지가 아닌 한라산을 걸었다는 게 중요하다. 다시 한번 뿌듯했다.
서둘러 한라산 등반인증서를 출력하고 차에 올랐다. 예정에는 내려와서 온천하고 밥까지 먹는 일정이었지만 생각보다 오랜 시간에 장비 반납하고 가기 바빴다. 9시 35분 비행기, 시간은 남았지만 공항 내 식당은 모두 청소 중이었다. 롯데리아에서 감자칩과 콜라로 허기를 달랬다. 지금껏 먹어본 콜라 중에 가장 맛있는 콜라였다.
비행기 안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동네에 도착하니 11시 30분이 넘었다. 24시간 하는 뼈나루 감자탕에 들렀다. 토요일이라 그런가 24시간 영업이라 그런가 손님이 많았다. 꿀맛이다. 예전에는 못 먹었던 음식인데 세월 따라 식성도 바뀌나 보다. 동생이 챙긴다. 내일 아침밥하기 힘들 텐데 한 끼 해결하자며 회비로 감자탕을 포장한다. 잘 챙기는 동생이 든든하고 예쁘다.
집에 와서 바로 자야지라는 마음 대신 성격 어디 갈까! 그 시각에 뒷정리하고 2시가 가까워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눈뜨니 11시가 넘었다. 한라산 등반에서 나를 챙겨준 등산복을 세탁해 늘고, 등산화 바닥도 개운하게 샤워를 시켰다. "너 아니었다면 정상에 오르지 못했을 거야. 고마워!! " 잘 말려서 신발장 맨 위 선반에 올렸다. 또 언제 신을지 모르는 등산화니 말이다.
한라산 여행을 마치며
제천에서 제주로 급변경한 한라산행, 함께하는 좋은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머리를 비우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비우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번 한라산행에서 느꼈다. 나도 개운하게 머리를 비울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배우고 싶은 게 많다 보니 늘 할 일이 많았다. 멀티태스킹이 좋지 않다고 하지만 늘 멀티테스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한라산을 오르내리며 내 머릿속은 개운하고 깨끗했다. 오로지 눈앞의 현상에만 집중했다. 힘들어서일까? 아름다워서일까? 깨달음을 얻는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떠올랐다. 생각난다는 건 간다는 거? 언젠가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남편 말대로 이번 여행은 아름다운 제주에서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자연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최고의 힐링여행이었다.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사랑합니다!!
시간과 돈을 벌어주는 딱 쉬운, 김주현의 행복한 정리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