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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데어 Jun 24. 2019

내. 가. 아. 줌. 마. 라. 니.

여전히 나인데 시간만 흐른다

아이가 둘이다. 내가..

그리고 나는 '집'에 있다. 그래, 이럴 줄 몰랐지만, 이젠 전업맘이다. 이십 대의 나는 지금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이가 둘인 일하지 않는 전업 주부... 요즘도 가끔은 나도 놀란다. 내. 가. 엄. 마. 라. 니.



"야~ 우리가 만나지 벌써 20년이네"


대학시절 베프였던 친구들을 만났다. 한 친구는 아이 둘의 엄마가 되어 육아 휴직 중이고, 또 한 친구는 비혼을 내걸고 오래전부터 꿈꾸던 카페를 오픈했다. 참 변한 것 없고, 이룬 것 없는 것 같은데,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이십 년... 그땐 세상 모든 고민이 다 나에게 쏟아지는 것 같았고, 세상 모든 외로움이 다 내 것 같았다. 이젠 누구나 자기만의 슬픔, 기쁨이 있고, 이 세상엔 영원한 것도, 절대적인 것도 없다는 걸 아는 마흔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오랜 세월이 흘렀고 지금도 흐른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내. 가. 아. 줌. 마. 라. 니.


횡단보도 건너편 사람을 보고 흠칫 놀랐다. 중학교 때 그 호랑이 선생님? 순간 긴장했지만, 금세 정신을 되찾았다. 그때 삼십 대 중반이셨는데, 지금도 삼십 대 아저씨 일리가 없잖아.. 바보같이 멈춰있는 기억에 흘러간 시간들을 얹히지 못해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머릿속 해프닝.. 그렇게 갑자기 과거의 어떤 기억이 호출되면 종종 이런 일이 발생한다. 아직도 세월을 '머리로' 이해해 나가고 있나 보다.


대학 새내기 시절, 우리 셋은 늘 함께했다. 십 대 소녀들 마냥 우리만의 비밀 돌림 일기장을 썼다. 그 일기장에 간직하고 싶은 사진들, 새로 만나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 미래에 대한 고민들을 빼곡하게 적어나갔다. 돌아보면 그때 우린 이 세상의 중심이었다. 우리의 웃음, 고민, 슬픔이 온 우주의 행복, 고민, 슬픔 같았으니까. 이제 그 일기장은 손발이 오글거리는 낯부끄러운 비밀과 드러내선 안 되는 약점이 적혀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없애버리기엔 아쉬워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졸업을 하고, 각자 직장을 갖고, 그렇게 30대가 되었다. 여전히 사랑은 어려웠고, 미래는 불확실했던 30대..


홍아, 때로는 봄에도 눈이 내리고 한 겨울 눈발 사이로 샛노란 개나리꽃이 저렇게 피어나기도 하잖아. 한여름 쨍쨍한 햇살에도 소나기가 퍼붓고, 서리 내리는 가을 한가운데에서도 단풍으로 물들지 못하고 그저 파랗게 얼어있는 단풍나무가 몇 그루 있는 것처럼, 이 거대한 유기체인 자연조차도 제 길을 못 찾아 헤매는데, 하물며 아주 작은 유기체 인간인 네가 길을 잃은 것 같다고 해서 너무 힘들어하지는 마. 가끔은 하늘도 마음을 못 잡고 비가 오다 개다 우박 뿌리다가 하며 몸부림치는데 네 작은 심장이 속수무책으로 흔들린다 해도 괴로워하지 마.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중에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버스 안에서 읽은 책의 구절을 읽어주었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조용히 친구가 휴지를 찾아 눈물을 찍는다.


"사실, 나 00랑 헤어졌어"


하며 눈물을 찍는 친구.


"나도..."


하며 그 친구와 함께 또 눈물을 흘렸던 나. 고기가 익어가는 불판을 앞에 두고 그렇게 처량 맞게 젊은 여자 셋이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위로해주던 한 친구는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는 걸 보고서야 조심히 말을 꺼낸다.


"나.. 임신했어"


연인과의 이별로 눈물, 콧물 찍는 친구들 앞에서 기쁜 소식을 꺼내놓기 얼마나 어려웠을까. 금세 또 우리는 까르르 버스 정류장이 떠나가라 웃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여전히 셋이서라면 우리만의 세상 속에 있는 것 같았다.


풋풋했던 열아홉에 만난 우리가 이제 마흔의 문턱을 넘고 있다. 사랑과 이별, 취업, 결혼, 육아 등 인생의 굴곡마다 함께 눈물을 찍기도, 세상 떠나가라 웃기도 하면서 그렇게 이십 년의 세월을 함께 했다. 우리에게 '우정'이란, 그 세월 속에도 우리는 '여전하다'는 것을 서로에게 확인시켜주는 그 무언가 일 것이다. 아줌마가 되어도, 더 이상 내 꿈이 보이지 않아도,  여전히 나, 그리고 우리가 내 세상의 중심이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그 무언가. 그래서 지친 육아에, 생활에 새 힘을 얻게 해주는 그런 우정 말이다. 갱년기가 되어 얼굴이 화끈화끈 거리고, 사춘기 소녀처럼 짜증을 내어도, 손등이 쪼글쪼글해져 그 어떤 네일케어도 어울리지 않을 때가 되어도, 뽑아야 할 흰머리카락이 남겨야 할 검은 머리카락보다 더 많아 거울 앞에서 울적해질 때에도, 우린 이렇게 말하겠지. "우. 리. 가. 할. 머. 니. 라. 니!!" 그리고 혹 옆 테이블에서 할머니 셋이 그렇게 외친다면, 절대 웃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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