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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데어 Mar 11. 2022

낭만에 대하여

별 보러 가자 / 적재


집을 청소했다. 매일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로 닦아도, 다음 날이면 뽀얀 먼지들이 여기저기 앉아있다. 이 많은 먼지들은 어디서 나타나는 걸까. 누군가 열심히 닦아내고 쓸어버린 먼지들이 바람에 날려, 우리 집에 앉았던 건 아닐까. 지금 내가 닦아내는 이 먼지들도 언젠가 다시 누군가의 집 탁자 위에 살포시 앉는 건 아닐까. 혹 아이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닐 때는 공기 중에 숨어있다가,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고요한 밤 먼지들도 고요히 소파 위에, TV 장 위에 내려앉은 건 아닐까. 


빨래를 갠다. 매일 닦고 치워도 쌓이는 먼지처럼, 매일 빨고 빨아도 빨래는 그대로다. 그래도 한바탕 먼지와의 전쟁을 치른 후 깨끗해진 집 안에 앉아 빨래를 개고 있으니, 이 또한 행복이지 싶다. 


틀어놓은 라디오의 노래가 이제야 들려온다. 


"♪어디야 지금 뭐 해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너희 집 앞으로 잠깐 나올래~♪"


산더미 같은 빨래 앞에 앉아, 박보검의 목소리로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를 듣는 이 아이러니함은! 연애 드라마를 보며 아직도 마음 설레는데, 문득 현실로 돌아오면 마흔을 넘긴 중년의 '아줌마'다. 아... 이젠 누가 내게도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하고 물어봐줄 사람이 없다. 


물론 내 청춘에도 그런 로맨티시스트는 곁에 없었다.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혼자였던 밤하늘, 너와 함께 걸으면 그걸로 돼"라고 다정하게 말해주는 연인 한 번 못 만나본 내 가엾은 청춘이여! 하지만 한 편으론, 그때 누군가 '낭만적'인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로맨틱한 이야기를 했다면, 또 손발이 오그라들며 몸서리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땐 누군가 나만을 오롯이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해주는 것이 왠지 부끄럽고 어색했었다. 어쩌면, 촉촉한 감성의 소유자, 예민하고 섬세한 남성성을 받아주지 못했던 '시대적' 고정관념이 그때의 많은 로맨티시스트들을 좌절시키고, 현실주의자의 길을 선택하게했을지도 모른다. 


 '낭만(浪漫)'의 한자는 '물결 낭 (浪)'과 '흩어질 만(漫)' 이 합쳐진 단어다. 프랑스의 '로맨스(romance)'를 한자어로 표기한 일본식 발음이지만, 한자를 풀어보면 그 의미 또한 재미있다. 물결은 바람이 부는 대로, 저항 없이 흩어지고, 바람이 부는 대로 일렁이고 흩어진다.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자유롭게 일렁이는 마음이 '낭만'이다. 사랑 앞에 계산적이거나,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사랑이 바로 '낭만적' 사랑이다.     


로맨티시스트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리얼리스트가 된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굳이 젊을 적 '로맨티시스트'를 좌절시키지 않더라도, 현실에 치이고 타협하다 보면, 서서히 리얼리스트로 물들어 버린다. 나에게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던 아이 아빠도, 중년이 된 지금은 '탈모약'을 먹어볼까 고민하고, 점점 나오는 아랫배를, 나이 들면 그런 것이라며 외면한다. 아이들과 아내 앞에서, 섬세하고 촉촉한 마음을 내비칠 틈이 없다. 아이들은 1년 365일 '웃긴' 아빠를 필요로 하고, 아내는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어주기는 커녕, '튼튼한' 성 같은 배우자의 모습을 기대한다. 어디 남자들만 그럴까. 나는 '여자의 자존심'이라는 굽 높은 구두에서 내려온지는 이미 오래고, 자존심은 커녕 '자존감'도 꽉 붙들어야 그나마 '여성성'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섬세하고 예민한 감정의 소유자가 되기보다는 '털털'하고 '무던'한 여성의 길을 택한 지 오래다.


그러니, 청춘들이여. 마음의 촉촉한 '낭만'을 지금 미리 포기하지 않기를. 바람에 일렁이고 흩어지는 마음은 젊음의 특권이다.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면 너무도 아쉬워할, 풋풋하고 촉촉한 마음의 흔들림을 마음껏 누렸으면 좋겠다. 닿을 수 없는 별이지만, '너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도 따'줄 것 같은 마음으로 손 꼭 잡고 함께 별을 바라보는 그런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빨래를 개며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를 듣고 있는 지금의 나는 그 청춘이 너무도 부럽다. 


어디야 지금 뭐해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어디든 좋으니 나와 가줄래
네게 하고 싶었던 말이 너무도 많지만

너무 서두르지 않을게
그치만 네 손을 꼭 잡을래
멋진 별자리 이름은 모르지만
나와 같이 가줄래

너와 나의 걸음이 향해 가는 그곳이
어디 일진 모르겠지만
혼자였던 밤하늘 너와 함께 걸으면
그거면 돼

(별 보러 가자 / 적재) 


날이 좀 더 따뜻해지면, 아이들과 별이나 보러 가야겠다. 

아..... 낭만이여!   





*Photo by Ivana Cajin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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