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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관 Jul 03. 2022

비빌 언덕

ㅣ나를 지켜주는 외부의 비빌 언덕이 필요하다면 



시신이 그냥 나가면 안 된다. 범죄자의 얼굴이나 수갑도 그냥 나가면 안 된다. 교통사고 현장의 차량 번호판이나 핏자국도 그냥 나가면 역시 안 된다. 모자이크도 형태 정도는 알아볼 정도로 할지 아예 확 뭉개서 무언지 모르게 할지 차등을 둬야 한다. 늘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뉴스 영상 만드는 사람의 사건 사고를 대하는 자세다.

 

방송하는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단연코 방송사고다. 특히 매일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뉴스의 특성상, 내가 편집한 영상이 나가는 시간에는 촉각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정치나 사건 사고의 경우는 더 신경이 쓰이는데 그림 한 컷 때문에 외부에서 항의 전화를 받기도 하고, 시신이나 피, 수갑 같은 부분에 모자이크를 놓치는 바람에 사고가 나기도 한다. 제목이 비슷해 테잎이 바뀌는 어이없는 사고가 나기도 한다. 그러니 아무리 확인의 확인과정을 거쳤다 하더라도 사고는 발생하고 뉴스가 끝날 무렵 휴대폰 울림은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다.      


일단 방송사고가 나면 절차나 수습의 문제보다도 자괴감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주위에서는 “누구나 실수를 한다. 다음부터 잘 하면 된다.”라고 위로하지만 일단 스스로 용납이 안 되므로 힘든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이런 자괴감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보도국장을 비롯한 간부들 식사자리에 동석한 적이 있었는데 방송사고가 화두로 떠올랐다. 본인들의 리즈시절 사고 낸 추억담부터 방송사고를 바라보는 시각 등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는데 한 선배가


 “사고도 일을 열심히 하니까 내는 거예요. 일 안 하는 애들은 사고도 안내요.”라고 했다. 


끄트머리에 앉아 이 말을 들었는데 그 인식이 너무 신선해서 고맙기까지 했다. 그날 이후 방송사고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부분 해소되었다. 물론 방송사고를 내면 안 되겠지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사고에 대해 확실히 예전보다 많이 의연해졌다. 


언덕에 멈춰 선 자동차


감당하기 어려운 자괴감이 밀려온다면 우선 긍정적인 자아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한데 의지만으로 자신과의 대화를 긍정으로 이끌긴 힘들다. 이때 외부의 비빌 언덕은 큰 힘이 된다.      


방송사고는 여전히 두렵지만 “일을 열심히 하니까 사고도 내는 거예요. 일 안 하는 애들은 사고도 안내요.” 

같은 비빌 언덕은 정말 큰 힘이 되었다.


 “왜 바보같이 사고를 냈을까?” 보다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같이 자신과 대화에서 소신 있는 긍정이 발휘되었다. 유리 같은 자존감이 벽돌로 변할만한 외부의 비빌 언덕을 하나쯤 만들어놓으면 삶이 편안해진다.




# 냉정한 평가는 좋은 글의 밑거름이 됩니다. 가감없는 댓글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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