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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lee May 12. 2024

갈팡질팡 치매 동반기

9. 위치추적으로 엄마를 찾는 일

위치추적기나 앱을 사용하게 되면서 길을 잃은 엄마를 찾는 방법은 쉬워졌다. 그러나 엄마가 스스로 집을 찾아오지는 못하니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지남력을 잃기 전에 시간을 구별하지 못하는 현상이 먼저 온다고 하는데 말하자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르는 것이다.  어려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인 줄 알고 학교에 가려고 준비하는 것과 같은 현상일까?라고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엄마의 경우에 이 때는 나는 엄마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마도 내가 중국 베이징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지나간 듯하다. 그러니까 우리 엄마는 독거노인이었다.


나는 50대 후반에 26년간 일한 회사에서 정년을 이년 앞두고 멋지게 말하면 중국으로 스카우트가 되었다. 베이징에 있는 부동산 개발회사, 한국으로 치면 건설사에 취업을 했다. 그때 중국엔 부동산 바람을 타고 테마파크 건설이 유행이었다. 난생처음 헤드헌터 통해서 중국회사에 들어갔다. 중국어는 한마디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때까지 중국이라고는 홍콩 옆에 심천이란 곳에 한번 가봤을 정도가 중국에 대한 경험이 전부였다. 화상으로 면접을 몇 차례하고 마지막은 베이징에 가서 면접을 봤다. 2013년도 6월 1일부터 베이징에서 일을 시작했다. 물론 내가 실력이 엄청나서 스카우트가 된 거는 아니고 다니던 회사에서 3명이 같이 이동을 했다. 그중에 총책임자였던 분이 나를 선택을 해서 우리는 모두 한 헤드헌터사를 통해 중국으로 이직을 했다.


첨에는 중국어도 모르고 음식도 안 맞고 적응을 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한 달 만에 6킬로가 감량이 되는 어마무지한 성과를 이루었다. 물론 3년 9개월 후 퇴직 시에는 원상복구를 했지만. 그때는 엄마의 이상도 눈치채지 못할 때였으니 두 달에 한번 정도 서울로 돌아왔다. 중국은 긴 연휴가 많다. 대표적인 연휴가 국경절과 춘제 기간이다. 보통 1주일에서 열흘 길게는 보름을 쉬는 경우도 있다. 퐁당퐁당 휴일 같은 경우는 몰아서 쉬게 해주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보통은 주말에 오지만 가끔씩은 길게 있기도 했다. 물론 이건 나의 개인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다. 중국어를 하나도 모르니 중국에서 살지만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없는 무지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다가 이 년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엄마는 치매 판정을 받았고 나는 한 달에 한번 오다가 나중에는 한 달에 두 번씩 오고 가는 고단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단한 생활이라는 건 내가 비행기 타는 걸 아주 싫어하기 때문이다.


베이징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 딸은 결혼도하고 아이도 낳아서 나는 퇴직을 하고 돌아와서는 딸이 출근하면 손자를 보는 할머니가 되었고 우리 엄마는 더 이상 독거노인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시간에 관한 건 내가 심각하게 못 느끼고 지나간 것 같다. 그때도 하루에 세 번은 전화를 했으니 아침엔 치매 안심센터에 가시라고 전화, 도착할 시간에는 잘 도착했는지 확인, 저녁엔 또 확인하느라 전화를 했다. 아마도 그렇게 해야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나 보다. 할 말도 없으니 통화 내용도 무지하게 간단히 정말 용건만 간단히였다. 그때는 센터에서 안 나오셨다고 연락이 오면 핸드폰이나 집 전화를 하면 받으셨고 왜 안 갔는지 이유를 말할 정도의 인지력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위치를 추적하는 앱을 깔고서는 엄마가 센터에서 나오실 즈음이면 위치를 확인하고 중간에 갈림길이 있을 때도 확인을 하고 집에 도착할 시간이 되면 무사히 도착하시면 나도 한시름을 놓는 하루하루였다. 그러나 앱이 엄마를 집까지 모셔다 주지는 않는다. 손자와 둘이 있다가 엄마가 집으로 오는 길이 아니고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면 헤매다가 집으로 잘 가시겠지 이런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결국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엄마를 찾아서 나가기 마련이다. 일정 지점에서 엄마를 발견하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계속 앞으로 걸어가는 엄마를 보게 된다. 그때는 엄마를 찾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더 컸지 엄마가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을지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나는 엄마보다는 늘 내가 먼저였던 거 같다.


한 번은 엄마와 딸아이의 집에서 있다가 우리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두 집은 걸어서 10분 정도로 아파트 단지는 다르지만 작은 고개를 하나 넘으면 되는 거리이다. 그 작은 고개의 정상에서 내려오면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큰길로 나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우리 아파트 입구로 가는 길이다. 내 걸음이면 오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이고 심지어 눈앞에 우리가 사는 아파트의 동이 보이기도 한다. 거기서 길을 잃어서 집에를 못 가실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사건은 일어났다.


나는 엄마를 먼저 보내고 머리를 자르려고 큰 길가의 미용실에를 가려고 언덕 정상에서 헤어졌다. 그리곤 머리를 자르고 아마도 집에 늦게 간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를 했던 거 같은데 엄마는 전화를 안 받았다. 그럴 때는 핸드폰 집전화를 번갈아 가면서 전화를 하는데 두 전화가 다 응답이 없다. 서둘러 위치추적 앱을 커니 8차선 도로 건너편 아파트 단지로 위치가 확인이 되었다. 만약에 머리 자르는 중간에 확인되었으면 반만 자르고 나갈 판이었다. 헐레벌떡 뛰어서 가니 그때도 역시 두리번두리번거리며 계속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노인네가 한 여름에 한 시간도 넘게 걸어 다닌 것이다. 반갑기도 하고 화도 나니 목소리는 커지게 마련이다.

나는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가 아이를 찾고 나면 울면서 아이를 야단치고 때리고 하는 마음을 이해한다.


"엄마!"

돌아보는 엄마의 얼굴은 구세주를 만난 표정이었다. 더위와 불안함에 치진 얼굴에 퍼지는 안도감이 보였다.

일단 편의점 의자에 엄마를 앉히고는 물을 사러 들어갔다가 물보다는 사이다가 나을 듯싶어서 사이다를

한병 사서 드렸다. 그 사이다를 한꺼번에 반 병도 넘게 마시는 걸 보고 화가 난 마음도 거품처럼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라리 주스가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탄산 때문에 마시기도 힘들었을 텐데 나는 엄마가 어떤 음료수를 좋아하는지도 잘 몰랐다.


엄마는 이미 나의 엄마가 아니고 내가 엄마를 돌봐야 하는 엄마의 엄마가 된 것이다.

어려서 아마도 7살 정도 되었을 때인가 창경원에 놀러 갔다가 가족들과 헤어진 경험이 있다. 돌계단 위에 서 있는데 밑에 보이는 사람들이 무채색으로 보였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때 엄마도 나를 찾고는 야단을 치면서 울었을까? 그런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엄마도 길을 잃고 헤맬 때면 그런 막막한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찾아주는 앱을 사용하면서 파출소도 더 이상 안 가고 엄마를 찾는 것도 훨씬 수월해졌다.

이런 앱은 아마도 여러 종류가 있는듯하다.

                                                             출처 : 아이쉐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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