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갯츠비는 인간의 탐욕을 그린 F. 스콧 피츠제럴드(1896~1940)의 소설이다. 갯츠비가 왜 위대한지는 모르지만 피츠제럴드는 이 소설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노심초사 자신을 떠나버릴까 싶었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40대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갯츠비, 톰, 데이지 모두는 탐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갯츠비는 군인 신분이었던 시절 데이지를 알게 됐으나 돈과 여러 가지 이유 등으로 이라는 고결해 보이는 데이지에게 가까이 가보지도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갈구했던 통속적인 인물이다.
운동선수였던 톰 부캐넌 역시 자신의 엄청난 재산을 앞세워 데이지와 결혼을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충실하지는 않다. 그들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항상 무엇인가를 계속적으로 갈구했다. 갯츠비가 어디서 무엇을 해서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는 몰라도 엄청난 돈을 가지게 됐고 이를 바탕으로 젊은 시절에는 감히 엄두도 못 냈던 이미 유부녀가 된 데이지 바라기가 되고 만남을 실천하려 한다.
데이지 역시 남편인 톰과 갯츠비 사이에서 누구의 재산이 나를 더욱 화려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갯츠비가 매일 밤 롱 아일랜드의 대저택에서 벌이는 호화 파티에는 많은 유명인사들이 초대되고 끝없는 탐욕이 펼쳐진다. 사촌인 닉으로부터 갯츠비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데이지는 자신의 멈출 수 없는 욕망을 갯츠비가 채워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소설은 끝없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권모술수가 난무를 한다. 과연 저럴 수 있을까 싶게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물질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다. 돈으로 못하는 것이 없는 자본주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할지도 모른다. 사실 연봉의 첫 단위가 바뀌면 많은 것이 바뀌기도 한다. 집이 바뀔 수도 있고, 차가 바뀔 수도 있다. 바뀐다는 것은 잠시 잠깐 기쁨을 주는 것도 사실이고 인간에게 뽐낼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되니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자녀들의 학원을 업그레이드시켜 주고 해외여행을 가고 참 많은 것을 달라지게 만드는 것이 돈이다.
자본주의 시대가 아니었던 그 옛날에도 돈은 검은 것을 희게 만들고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들며, 나쁜 것을 좋게 하고 늙은 것을 젊게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득 나는 어떤 인간인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삶에 목표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삶에 짓눌려 무엇도 하고 싶어 하지 않기도 한다. 어쩌면 권력이 원하는 소시민의 전형인가 싶기도 하다. 과연 욕망이라는 것이 나에게 있었던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아마도 최근 10여 년간 연봉 인상이 전혀 없었다는데서 체념형 인간으로 바뀐 듯하다. 그래도 매일 커피 한잔과 처음처럼 한 병은 마실 수 있는 돈은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탐욕이란 바닷물로 갈증을 해결하는 것과 같이 마시는 동안만 목마름을 해소하고 잠시 후면 더욱 심한 갈증으로 몸부림치는 것과 같다고 한다. 혹자는 돈 모으는 재미가 세상의 무엇보다도 만족감이 높은 취미라고도 한다. 그러나 지나 친 부가 삶을 망가 뜨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반면에 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며 세월을 허송하는 것도 딱해 보이기도 한다. 개인이 제어하지 못하는 부분은 사회 시스템이 제어를 해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최근 재벌가의 갑질 문제도 본질적으로 탐욕에서 자유롭지 않다.
연봉 3천만 원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연봉 1억 원에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