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아버지는 성격이 드셌다. 속은 여리시지만 동네에 다툼이 나거나 하면 다툼의 이웃 분들의 내자 되시는 분들이 모시고 갔다. 그러면 중재를 하셨고 그런 날이면 화해 주로 불콰하게 한잔하고 오곤 하셨다. 그런 날이면 어떤 때는 어머니에게 어떤 때는 자식들에게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말을 하셨고 결말은 항상 주제가 무엇이든 높은 언성었고 그다음은 마룻바닥에서 목침을 베고 주무시는 것이었다. 한 대 밖에 없는 선풍기도 혼자 독점적으로 사용하시고 말이다. 내가 술을 마셔보니 여름 한 낮이나 오후이더라도 술을 한잔하고 자면 더운 기운에 쉽게 잠을 자기는 어렵다.
다른 길로 빠지는 것이기는 한데 갑작스럽게 낮잠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전세훈”이라는 분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것을 옮겨 적어 본다.
지난밤 설친 잠을
메꾸려 낮잠드나
꿈속을 헤매다가
얼결에 깨어난다
젊은 날
응어리들이
낮잠 속에 넘친다
- 전세훈-
젊은 날의 응어리들이 꿈속에 넘친다는 부분이 있다.
나도 가끔 부모님과 어린 시절 살았던 집이나 고등학교 친구들이 꿈속에 등장하곤 했다. 어떤 때는 어린시절 살았던 집과 전혀 다른 집이 꿈에 보이곤 한다. 뭔가는 항상 엉성했다. 직접 본 것이 아니라서 뇌가 만든 꿈이어서 미완성된 그림 같다. 그때의 꿈속에서는 자동차를 운전해도 막상 엔진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자동차 안에 앉아 만 있지 실제는 내 다리가 움직이는 경우도 있었다. 자주 지각을 하는 꿈도 꾸는데 지금은 그런 꿈을 꾸면서 꿈속에서 꿈이라고 깨닫는 경우도 있다. 이 건 꿈이야 겁낼 필요가 없어하고 말이다.
꿈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본다. 나는 창문을 열고 자면 새벽 찬바람에 반드시 가위눌리는 꿈을 꾼다. 검은 물체가 들어와 내 몸을 누르거나 아님 비슷한 것이 내 방을 채우는 그런 느낌이 들곤 하는 데 이마저도 이제는 꿈속에서 스스로 깨닫고 아! 내가 지금 창문을 열어 놓고 자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내게는 누님이 한분 계시는데 부모님이 낮 동안 모두 일을 하러 나가시는 통에서 어려서 부터 학교를 결석하고 미취학 상태였던 동생들을 돌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누님의 기억으로는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도 아버지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다고 했다. 누님이 말씀을 참 잘하신다. 조곤조곤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듯싶다. 그러니 그런 성향이 아버지에게로도 향했을 것이고 어쩌면 아버지의 화를 돋우는 일로 번졌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상급학교에 보내주지도 않고 설움만 안겨 줬으니 정말 나 같아도 화가 많이 났었을 듯싶다. 나를 낳아 준 부모가 맞는지부터 해서 이럴 거면 나를 왜 낳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은 기본적으로 갖지 않았을까. 그렇게 고생을 한 누나여서 인지 지금은 혼자되신 누님 걱정에 어머니는 자주 눈물을 보이신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선생님들이 찾아와 이 댁 아이가 공부를 잘하니 상급하교에 보내야 한다고 해도 막무가내셨고, 상급학교에서 학비를 전혀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던 아버지는 상급하교 진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결단력도 부족하고 무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고단하게 살았던 누님은 지금도 고단하게 사신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 애들 공부에 지극 정성을 들였지만 아이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간다. 자식들도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보면 만만치 않은 것이기에 뭐라 할 말은 없다.
나는 가끔 운명론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서 아이 엄마로부터 핀잔을 자주 듣는다. 허무주의자 같다거나 아니면 사람이 목표가 없다거나 하는 쪽으로 연결시켜서 말이다.
그런데 실상 세상과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다 보면 운 좋게 복권에 당첨되는 이도 있고, 게임만 하다가도 큰 수입을 얻는 이들을 보게 된다. 물론 열심히 노력하는 이들도 사회적으로 성공을 한다. 비율적으로 보면 열심한 이들이 성공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러한 것들을 보고 그런 교육을 받고 하다 보니 삶이 어쩌면 자연히 세뇌가 되어 자식들에게도 일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하고 학업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다그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이왕이면 선택지 조금이라도 더 넓어지고 그러한 사회 속의 구성원으로 있어야 즉 인사이더로 있어야 세상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조금은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 없이도 우연치 않은 기회를 잘 잡아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이들도 부지기수로 많다. 초등학교만 나오고도 금형회사 취직해 금형을 배우고 사장님의 도움으로 회사를 차려 어엿한 중소기업 대표가 된 이들도 적지 않고, 연고 없는 사장님의 회사를 물려받는 경우도 보았다.
반대로 대학을 나오고 자신의 삶에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이들에게도 일반인들이 통속적으로 생각하는 성공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게 본다. 물론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주요한 것만을 살펴보면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다른 이들과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노력의 크기는 대동소이했다.
그런 고로 나는 삶은 주어진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명품은 작은 차이에서 나타난다는 광고 카피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노력을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노력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고 삶을 살아내는 이유가 되기도 하기에 말이다. 또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여 살아내는 것이 지금 세상에서 나의 몫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나의 인생이 실패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인생은 총량의 법칙과 같다. 삶을 구성하는 것이 인간관계, 의식주의 질, 질병, 가족관계, 돈, 명예 등 다양한 것이 있다. 이 중 잘 산다고 보는 것은 돈이나 명예를 압도적으로 높은 위치에 놓고 평가를 한다. 이 부분만을 놓고 보면 총량의 법칙을 적용하기 곤란한 면이 없지 않으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인들을 결합시켜 보면 완벽한 성공은 손에 꼽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삶을 한 번 돌이켜 보자.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동기들을 갖고 사회에 나와 마음에 드는 배우자와 가슴 떨리는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집 장만에 성공했다면 보통 30대에서는 성공한 삶이다. 성공한 삶의 구성요소가 이런 것들로만 이루어졌다면 말이다.
그런데 행복한 삶이란 반드시 그렇지 않다. 삶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어야 하고 고민에 대한 해답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조금은 행복한 삶이 아닌가 싶다.
인생을 살면서 잘 사는 이나 못 사는 이나 모두 질병이나 사고 등을 경험한다. 결혼을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입사가 쉽지 않았던 회사에 들어간 다음 날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어려서부터 막노동을 전전하다 요리사로 성공하는 이도 있다. 노력만 해서 되는 일이라면 공부만 해서 되는 일이라면 성공은 반드시 공부를 많이 하고 사회가 바라는 노력을 끊임없이 한 이들만 성공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다. 물론 비율과 표본의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또 성공한 삶으로 가기 위해 하는 것들 중 많은 것이 배워서 성공한 이들의 표본이 많다는 것도 나의 주장이 갖는 한계성을 갖는 이유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흙수저와 금수저 논리도 어쩌면 여기에 부합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주어진 운명을 노력으로 극복하는 것이 가능은 하지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사례이니까 말이다.
그런 고로 나는 주어 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영위하다 보면 우연히 성공한 삶을 가질 수도 있다.는 그런 확신 같지 않은 확신을 운명처럼 지니고 있다.
아버지가 어느 날은 누님이 교회에 다니는 걸 못마땅해하셨는지 성경책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하신 적도 있다. 그때 외할머니가 집에 와 계셨는데 외할머니가 말리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런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외할머니께서 그런 성스러운 책을 불사르면 안 된다 하셨는데 실상 외할머니도 절실한 신자는 아니셨다. 외가댁에 가보면 외할머니가 어느 때는 교회에 어느 때는 성당에 가시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일관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 갔던 교회는 마룻바닥에 방석을 깔고 예배를 보았는데 한참을 앉았다 일어나면 다리에 쥐가 나 곧바로 걷기가 힘든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개울가 옆의 하얀색 건물의 교회는 지금 예쁘게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