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어느 집에서 잔치를 할 요량으로 돼지를 잡는 모양이다.
이렇게 돼지가 요란하게 울며 호들갑을 떠는 때는 보통 먹이 주는 때를 놓쳐 배가 고팠거나 예방주사를 맞는 날이거나 아니면 집안 잔치에 쓸 요량으로 도축할 때였다. 예전에는 회갑잔치(그 당시에는 60세를 넘긴 노인들도 흔하지 않은 시절이다)를 비롯해 자식의 혼사도 집에서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 대청마루에서 사모관대를 쓴 신랑과 연지곤지를 찍고 족두리를 쓴 신부가 동네 사람들 앞에서 예식을 치르는 기억이 흔하지 않게 기억에 남아 있다. 300호가 넘는 우리 시골마을은 가구원 수가 보통 9명 이상은 되었으므로 인구수만 보더라도 3000여 명에 달해 큰 동네라 할 수 있었다.
300호가 넘는 시골이었기에 고기를 파는 육간집도 있고 약국도 있었지만 육간 집에서 전량 돼지고기를 대기란 현금이 부족한 가정에서는 좀체 힘든 일이었을 것 같다. 돼지의 도축은 대부분 늦가을부터 봄철에 많이 이루어졌다. 집안행사도 농번기를 피해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기에 대부분의 도축시점도 엇비슷했다. 돼지 도축행위는 대부분 수확이 끝난 빈 논과 밭에서 이루어졌는데 또 이 시기여야만 냉장시설이 부족했던 시골에서 고기를 오래 보관하고 먹을 수 있었다.
돼지의 양발을 묶고 저울에 무게를 측정한 다음 도끼 등으로 머리를 내리쳐 숨을 빼앗았는데 타격이 어긋나 설핏 맞았을 경우 그 과정에서 커다란 울음소리는 필연적이었다. 돼지의 숨이 끊어지면 끝이 날카로운 칼로 멱을 따고 검붉은 색의 선지를 따로 받아 냈다.
예전에는 읍면단위 지방에서 도축시설도 거의 없었고 도축장을 통한 도축도 대규모 사업자를 제외하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 동네에서는 소 도축은 몰라도 돼지 도축은 동네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해 나갔다. 동네마다 돼지를 도축할 수 있는 이가 몇 분은 꼭 있었는데 돼지를 잡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고 온 동네 아저씨들이 다 덤벼들어야 겨우 작업이 이루어졌다. 돼지 잡을 때 반드시 돼지의 중량을 반드시 확인했던 기억이 있다. 돼지를 묶어 메 달고 커다란 저울로 근수를 달았는 아마 250킬로그램 이상은 되어야 했던 것처럼 기억이 된다.
흔히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멱은 목의 다름이 아니다. 멱을 딴다는 것은 목을 칼로 찌른다라는 소리이겠다. 이렇게 받아낸 선지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해장국집에서 맛보는 그 선지해장국 속의 검고 두툼한 두부 같은 느낌의 음식물이다. 그런 다음 힘센 장정들이 달려들어 넓은 고무대야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우고 돼지를 통째로 넣어 이리저리 굴린 다음 날이 선 칼날로 털을 깎아낸다. 흑돼지나 흰 돼지 모두 털을 벗겨내면 피부색은 다르지 않다. 배를 절개하고 내장을 들어내 바구니에 담고 부위별로 해체를 한 후 마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만큼 부위별로 선택해 판매하기도 하고 전량 잔치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내장 즉 곱창과 기타 부산물은 주로 돼지를 잡은 사람들끼리 돼지 잡는 품삯으로 가져갔다. 어른들은 돼지를 잡으면서 옆에 짚불을 피워놓고 맛이 좋은 특정 부위를 잘라내 짚불에 구워 먹기도 했다.
돼지 내장의 일부로 오줌보라고 있는데 탄력성이 좋아서 바람을 불어넣으면 축구공만큼 커져 아이들이 가지고 놀기에 좋았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축구공도 넉넉하지 않아 가끔은 돼지 오줌보로 축구를 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가죽으로 만든 축구공을 많이 이용했는데 저학년이었을 때에는 이 오줌보로 만든 축구공이나 고무로 만든 축구공을 많이 사용했는데 내구성은 형편없어 몇 번 차면 찢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은 마당이 넓은 집에서 마을 아이들과 함께 고무로 만든 공으로 놀고 있었는데 일터에서 돌아오던 그 집 맏아들이 부산하게 자기 집 마당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못마땅했었는지 고무공을 송곳으로 찔러 먼 곳에 던져 버렸는데 그 사정을 모르고 바람 빠진 고무공을 찾아왔더니 내가 공을 찢었다고 오해한 친구들이 있었다. 하여튼 어린 시절의 시골 생활에서 돼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집안의 소중한 살림밑천이기도 했지만 키우는 과정에서 돼지로 인해 많은 문제를 낳기도 했다. 우선 해충들이 들끓고 여름철엔 고약한 분뇨냄새로 정신을 차리기 쉽지 않다. 반면에 음식물쓰레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었다. 당시에도 돼지가 질병을 전파하는 매개 역할을 하기도 해서 여름철이면 돼지 집 전체를 모기장으로 감쌌던 기억도 있다.
요즘 외국인과 결혼한 이들의 유튜브 방송이 먹방만큼이나 많은 것 같다. 타국에서의 생활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방송도 있고 해서 참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라오스나 베트남 등지에서의 촬영 본을 보면 우리의 60~70년대 처럼 돼지를 키우는 가정이 적지 않게 나온다. 또한 돼지가 가족 처럼 친근하게 아이들과 함께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어릴 적 시절에도 집집마다 돼지 한 마리씩 키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집에서만도 호랑이 무늬의 돼지를 비롯해 흰털돼지 흑돼지 등 다양한 털색을 가진 돼지들을 키운 듯한데 돼지새끼를 받아 보지는 못했다.
동네의 어느 집은 돼지새끼를 분만하기까지 했는데 암퇘지를 수정시키기 위해 수퇘지가 있는 집까지 먼지 폴폴 나는 신작로를 통해 회초리 하나 끼고 돼지를 끌고 가기도 하고 경운기에 간신히 실어 이동하기도 했다.
어느 때에는 머리에 비녀를 꽂은 할머니가 구멍 난 반소매 러닝셔츠 사이로 드러난 풀 죽은 가슴과 한 손엔 곰방대를 들고 돼지를 데리고 가던 기억도 있다. 그런 걸 기억하다 보면 현재의 동남아의 어느 시골마을과 우리의 문화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돼지가 키워지는 동안의 돈사는 항상 축축했다. 분뇨 통은 항상 넘쳐흘렀고 드러나 하수구엔 요즘 4대 강 개발로 수질이 악화된 그곳에 가끔 보았던 그 붉은색의 선형벌레들이 가득했었다.
늘 배가 고팠던 시절
돼지를 잡으면서 어른들이 구워 먹던 고기 한 점에 대한 애달픈 눈빛
그리고 우리의 오줌보 축구공놀이
그럼에도 그 시절의 아이들에게는 자유의지를 통한 선택이 있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우리가 구축해 놓은 틀 안에서 보호라는 명목으로 통제를 하며 키우고 있는데 그 당시의 아이들은 삼시 세 끼를 먹는 것을 제외하면 아이들 스스로 결정하고 기준을 정하고 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