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by 이상훈

왜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을까!

어린 시절이라고 해야 기껏 10여 년 안팎일 텐데 말이다. 성년이 된 이후부터 내일모레면 60이 되는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의 것들이 많다. 이러다 보니 정말 어린 시절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처럼 절대적이라면 어린 시절 누구든 소중한 것들을 많이 키워줬더라면 달라도 정말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물론 다른 많은 이들도 어릴 적 도움을 제대로 받았더라면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종종 보긴 했다. 한마디 더 덧붙인다면 나는 어릴 적 매우 영민했던 사람이라고 기억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이선희의 “J에게”가 거리 곳곳을 채우던 대학 1학년 때인 85년도에 대학신입생 OT와 MT를 한 번 다녀와서는 졸업여행이나 기타 대학이나 학과에서 벌인 축제나 여행을 같은 과 친구들과 같이 해 본 적이 없다. 동아리 활동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어디를 그렇게 혼자 다녀본 기억이 생각나지 않는다. 더욱이 동아리에 가입한 적도 없다 보니 학과나 비슷한 연배의 동급생들과의 친분도 많지 않다. 대학을 진학하지 않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뭐 대단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비싼 등록금만 냈지 참 별 볼이 없는 대학시절이었다. 최루탄의 뿌연 냄새 속에서 줄곧 같은 과의 몇몇 동급생들과 술이나 퍼 마시러 다니며 되지도 않는 개똥철학이나 읊어댄 것이 학창 시절의 전부가 아니었나 싶다. 유유상종이라고 비슷한 애들끼리 몰려다니면서 내성적인 몸짓으로 술잔이나 깨고 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술만 마시면 울거나 막걸리병을 던지거나 하는 애들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애들이 의외로 많았다. 오히려 많은 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돈벌이를 하는 친구들이 나 보다 훨씬 나아보이기도 했다. 그 당시의 나는 그저 미래에 대한 꿈보다 불안과 답답함이 더 컸고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욕망 뭐 그런 것이 꿈틀대기도 했던 것 같다. 혹시나 사법시험에 합격하지는 않을까 하는 웃기지도 않은 기대감 뭐 그런 것이 조금은 있었다.



기억이 전혀 없을 줄 알았는데 한 줄 한 줄 글을 쓰다 보니 여름 한 때 비가 내리던 날이나 연탄을 갈다 눈이 살포시 내리던 것을 본 날, 85년 11월 11일 일본어 시간에 창 밖에 내리던 눈송이를 보던 날 등 기억에 떠오르는 것이 생긴다. 첨에는 공부를 안 해서 공부를 못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지금에서 보니 그렇게 공부를 할 기본적도 자세도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 신분의 위화감 같은 것 때문인지도 몰랐다. 민주화 투쟁의 한가운데에서 몸부림치는 친구들과 최루탄 연기 사이에서 대학생활은 무척이나 답답했다. 그래서 영어회화학원 등을 다니면서 약간의 격차를 해소하려 했지만 역시나 그 정도로 해소될 사안도 아니었다. 사람의 삶 속에 무엇을 담아야 정답이 되는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그때에도 내 안에 담아야 할 것들이나 비슷한 동년배들이 담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무척이나 소극적이었다.



스물한두 살 때다. 같은 과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던 한국기독교장로회 계열의 교회에 다니다가 공석이었던 청년 학생회장도 해보았다. 당시 나름 노래패 책자도 만들어보고, 교회에서 중고등학생들에게 연극도 시켜보기도 했다. 여름방학 때는 아이들과 성경학교도 같이 하고 마무리하는 날에 같은 과 친구들 옆 대학 선배들과 함께 순대볶음에 술 한 잔 기울였던 생각도 난다. 자취하면서 혼자 밥을 먹다가 이렇게 같이 나누고 술잔을 들고 흰소리 해대며 알딸딸한 술기운을 알아간 것도 나쁘지 않았다. 20대 초반이 그렇고 고등학교시절엔 어쩌면 좀 더 처절했다. 학교 주변에서 삥을 뜯는 불량배들과 대립해야 했고 같은 집에 자취하는 친구들과의 감정싸움도 소록소록 잦았다. 청소를 안 한다거나 반찬을 안 만들어 놓는다거나 하는 것들로 말이다. 참 열심히 공부를 했던 친구들인데 말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사촌과 같이 자취를 하기도 했고, 담임선생님이 자기 집에서 다니라고 권유를 받기도 했는데 그 선생님은 오래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내가 자취하던 집 주변엔 사촌의 친구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이 공업계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중 한 아이가 내가 장학금을 산 라디오를 훔쳐가기도 했었다는 기억이 난다. 실제 공업고등학교 주변에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불량스러운 일들이 벌어졌다. 어느 날은 아이들의 선망이었던 나이키 운동화가 사라지기도 했다. 비슷한 짝퉁 운동화인 나이스도 성행하던 시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던 것 같다. 3학년 때에는 경주와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17개 반이라서 차량도 아마 그 정도인 17대 정도 간 듯하다. 버스 량이 많으니 교통정리하기도 쉽지 않다. 학생을 관리하던 학생 주임과 교련선생님은 아주 죽을 맛인 표정이다. 남녀합반이었음에도 별 다른 사고도 없었다. 아마 내가 가담한 것이 없이 그리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럴 정도로 참 조용히 보낸 고등학교시절도 지낸 것 같다. 그저 차에 오르라면 오르고 내리라면 내리고 하는 등 지도 선생님의 지시에 묵묵히 따를 뿐인 학교 생활이지 않았을까 싶다.



기억력이 정말 형편없었음에도 지금도 여전히 공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그 한 때는 잘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말이다. 공부는 아마 중학교 시절 때까지가 하이라이트였을까 그도 아마 단순히 역사 영어 국어 수학 정도이지 이렇게 딱딱한 도덕이나 법 과목은 내 정서에 부합하지 않았다.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특별히 취직할 곳이 혹은 하고 싶은 일들이 마땅하지 않으니 주야장천 시험만 보았을 때도 있었다. 뭐 특별히 머릿속에 넣어 간 적이 없었던 듯싶다. 물론 학원을 다닌 적도 없다. 학원이라도 다녔으면 좀 낫았으려나 싶기는 하지만 말이다.

특히 법률 서적은 정말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 행정법 민법을 매일 들여다보아야 머리에 남는 것은 일도 없었다. 손으로 하는 것은 재주가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이제는 손도 메주 같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 고쳐 쓰는 것도 많았는데 말이다. 그러면 말로만 하는 재주는 있을까?

밤을 잊은 그대에게 별이 빛나는 밤에 이런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을 들으면서 청춘을 보냈는데 흔히 그렇게 몸으로 부딪쳐 본 나의 청춘은 없고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았거나 듣기만 했던 청춘만을 가지고 있는 20대였다. 음악 특히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노트에 낙서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버릇이 딸에게도 전이가 된 것 같다. 딸아이도 지금 그러는 것을 보면 말이다. 청춘은 청춘답게 몸으로 부딪히고 해야 하는데 여전히 낯설고 힘들다.



10대와 20대의 나는 어느 누구에게 말을 붙이는 것을 힘들어했다.

20대의 삶 중 그나마 재미있는 일이었다면 골목 계단 밑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집을 어떻게 알아 친구들과 자주 특히 비가 오면 소주잔을 기울였던 일이다.

정말 몸치 몸치 하는데 이렇게 몸치, 음치, 기억치 하하하 잘하는 것이 이렇게 없을 수도 없다.

20대 중반에 어쩌다 주간신문사에 입사를 했다.

이삼일 정도에 12면을 편집하는 편집기자직이었는데, 원고는 대부분 화요일에 마감을 하여 목요일 저녁에 면 마감을 하고 제판실 넘기면 금요일 저녁에 인쇄되는 일정이었다. 매주 그 수레바퀴 같은 일들이 반복되었다. 술이라도 마시면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혼자 사는 삶이니 술 마시는 날이 많았다.

선배 기자분들도 편집회의 정한 당초 목적대로 글을 써오지 않았다. 그러니 편집의도대로 제목을 단다. 기사 내용과 다르게 말이다. 그게 습관이 되어 지금도 내 맘대로 제목을 뽑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기사를 쓴 기자의 의도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게 제목과 부제를 달아간다. 내용을 진지하게 읽어 보는 이라면 얼마나 웃길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었다. 기사를 다 읽지 않아도 기사를 읽은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도록 제목을 뽑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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