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육촌 당숙 집을 방문하면 어느 철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마당에 멍석을 펴고 보리싹을 틔운 엿기름을 말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요즘에는 멍석도 흔하지 않고 엿기름을 만드는 집도 거의 없다. 기름은 기르다에서 나온 말로 흔히 우리 시골에서 들기름이나 참기름과는 기름의 어원이 다르다. 엿기름은 아마도 보리 싹을 틔어 말린 것을 엿을 만드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이름 지어진 것으로 추정해 보기도 한다. 엿기름은 엿을 고는데 말고도 다양한 쓰임새가 있는데 고추장을 만들거나 식혜를 만드는데 꼭 필요한 재료이다. 엿기름을 한자로 맥아라고 쓰는데 맥아를 만드는 재료는 보리 외에도 밀, 쌀 등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단다. 그 옛날에 맥아에서 아밀레이스가 있는 줄 알고 어떻게 쌀에서 당을 추출하여 엿을 만들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참 많은 경험적 삶에서 이뤄낸 성과이지 싶다.
조청이나 엿을 만들려면 고두밥을 지어 거기에 엿기름가루를 섞고 물을 넣어 끓이면 조청을 만들 수 있는데 이때 걸러진 찌꺼기를 엿밥이라고 한다. 엿밥은 식혜 쌀알 같이 단맛이 강해 그 옛날 간식거리 많지 않을 때는 간식으로도 많이 먹었다. 사건은 엿밥이 동동주를 걸러내고 남은 술지게미와 외향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물론 냄새를 맡아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문제이기는 한데 술지게미와 엿밥을 자주 보지 못한 아이들은 서로 비슷하다고 판단해 먹기도 한다. 술지게미는 맛이 없어서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겠지만 막걸리기운이 남아 있어 소량을 먹어도 취기가 돈다. 그래서 예전 수도승들이 술은 못 직접적으로 마시고 표 나지 않게 술지게미를 통해 술기운을 느꼈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서양에서도 포도주 찌꺼기로 만든 저가형 포도주도 있고 찌꺼기를 증류해 브랜디를 만들기도 했단다. 이를 포메이스 브랜디라고 부르는데 포메이스는 찌꺼기라는 뜻이고, 이렇게 만든 브랜디를 나라마다 각자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어쨌거나 술지게미를 엿밥 대신 먹어본 동생이 나에게도 있고 그 친구가 어느 날은 집에서 담근 달짝지근한 포도주를 마시고 술에 취해 낮잠을 자는 것을 본 적도 있다. 먹을 것이 많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 그냥 웃을 수만도 없다. 관련한 사건은 다른 곳에서도 벌어진 듯도 한데 우리가 잘 아는 “검정 고무신”이라는 만화에서도 기철, 기형이 형제가 술지게미를 먹고 취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만화 검정고무신에 나오는 먹고 싶었던 것 고르기 에피소드 중의 하나 술지게미엿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오는 엿밥은 맛도 달고 식혜의 밥알 보다 단맛도 강해 아이들이 간식으로 먹어도 참 좋았다. 연구자료를 보면 엿밥에도 식이섬유, 폴리페놀, 이소플라본 등 몸에 좋은 성분이 많이 들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조청을 약한 불에 오래 달이면 강도가 높은 엿을 만들게 되는데 쟁반에 콩가루를 깔고 그 위에 넓적하게 펴서 보관한다. 이런 강도가 센 엿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조청으로 만든 콩강정이나 과줄 등이 더 좋았던 듯싶다. 물론 좋다고 더 많이 먹어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콩과 쌀튀밥을 적당히 섞어 만든 것이 식감은 더 좋다. 만드는 방법을 더듬어 기억해 보면 우선 콩 볶은 것과 튀밥을 섞은 다음 거기에 물엿을 넣고 비빈 후 틀에 넣어 굳히면 콩 쌀튀밥 강정이 된다. 조청을 기본으로 깨를 넣기도 하고 다양한 것을 넣어 만들기도 했다.
흰 가래떡을 조청에 찍어 먹으면 설탕이 아닌 것으로 단맛을 내는 데는 이 이상 없다. 엿 고는 마을의 아이들이 머리가 좋다는 속설도 있는데 아마도 엿기름 속에 들어 있는 비타민B, 식이섬유, 폴리페놀, 이소플라본 등이 면역력을 높이고 뇌 기능을 활성화시켜 주어 그런 듯 싶기도 하다.
어머니가 강정을 만들어 시렁에 올려놓아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게 부모님이 출타하고 안 계시면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가 의자를 놓고 올라가 콩이나 튀밥으로 만든 강정을 도둑질하듯이 먹어 버린다. 조금씩 오래 먹도록 하려 했던 부모님의 수고는 만드는 날부터 지켜지지 않았다.
이외에도 지금과 같이 설을 앞둔 때이면 가끔 어머니하고 과줄을 만들던 기억도 있다.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손톱크기로 잘라 꾸덕하게 말린 다음 기름에 튀기면 크기가 손바닥만 하게 커지는 데, 이렇게 커진 튀김에 조청을 바르고 튀밥을 입혀서 과줄을 만들었다. 지금과 같이 시장에서 파는 액상 엿은 금방 딱딱해지는 데 조청으로 만든 과줄은 부드러운 식감이 오래도록 유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