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지적 과잉의 시대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담아 두지 못한다.

by 이상훈

酒逢知己千鍾少요 話不投機一句多니라.
술은 나를 아는 친구를 만나면 천 잔도 적고, 말은 뜻이 맞지 않으면 한 마디도 많으니라."

利人之言은 煖如綿絮하고 傷人之語는 利如荊棘하야 一言半句 重値千金이요 一語傷人에 痛如刀割이니라.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따뜻하기가 솜과 같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 말은 날카롭기가 가시 같아서 한마디의 무게가 천금과 같고 한 마디 말에 의한 상처는 아프기가 칼로 베는 것과 같으니라.”
위에 언급한 두 경구는 모두 동의보감에 나오는 “말(言)"과 관련한 글이다.
이런 경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한 번 밖으로 쏟아낸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등 말의 진중함과 관련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듣고 보며 자라왔다. 어찌 나쁜 것은 스펀지에 물 스며들듯 우리 몸에 참 쉽게 체화되면서도 좋은 것들은 왜 한낱 관념 속에만 머무는지 모르겠다.
흥분도 진중함 못지않게 필요한 때가 있을 수 있겠으나 지극히 바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나치다 싶게 일어나서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연예인 이야기부터 사무실 갑동이 이웃집 을순이 엄마 이야기까지 무수한 레퍼토리로 비난과 지적을 이어간다.
상대를 경쟁상대로 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제한적인 이유에서 기인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잘못됐기 때문에!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 상대를 깨우쳐 보려는 인간의 본성의 얄팍한 이기심에 기인한 것일까?

말의 진중함을 필요로 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고전을 읽어 보아도 과거 현재 모두 유사한 인물과 상황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과잉 지적에 의한 과잉 반응 등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기에 진중함에 대한 경구가 자주 등장하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 부쩍 두드러지게 지적이 과잉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첫째, 시대착오 현상에서 오는 오류이다.
50년대 이후 출생하신 분들의 경우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80년대 민주화 운동 등 사회 참여도도 확실히 높았다. 당시의 대학생들은 학문적으로나 민주국가의 정체성 확립 면에서나 그들 부모세대보다 선각자적인 위치를 가지려는 의식을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었다.
8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이들의 노력과 열정 그리고 개발도상국가의 특성 등으로 10% 이상의 초고속 경제성장을 질주했으며, 민주화가 덜 성숙된 것과 금융 및 서비스 분야를 제외하면 제조업 건설업 전기통신업 등 분야를 막론하고 엄청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이들의 시각에서는 최근의 경기 부진이 답답할 수밖에 없다. 또 민주화 세력으로서 대한민국을 독재와 군부로부터 지켜냈다는 자부심도 누구보다 강하다. 그렇기에 일부에서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 혹은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해서 성공했다”, “지금 아이들 같이 지원해 주었으면 더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해한다.
고속성장 시기였기에 지금의 아이들보다 투자 대비 성공률이 분명히 높았고, 고생을 많이 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요샛말로 교육비에 대한 가성비가 좋고 자본 집중력도 덜한 시대였다. 또 가난을 벗어나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서 자수성가하셨던 분들의 시각에서 요즘 학생들을 비롯하여 직장 초년생들은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취급을 당하기 일쑤이다.
그러한 시대적 환경이 이들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가져왔을까? 정면돌파 지향적이고 신념이나 의지가 다른 세대 보다 많지 않을까! 이러한 시대적 영향으로 오류를 개선하는 데 있어서 “지적”이 하나의 방법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시대에 태어났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시대착오에 의한 오류임에도 말이다.

둘째는 뾰족한 말에 대한 화자의 공감 부족이다.
말을 정돈하여 상대에게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능력은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런데 이런 전제가 뾰족한 말을 양산시킬 수 있는 환경이 되기도 한다.
시간을 다투는 현대 사회에서는 짧은 시간에 많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많다. 시간이 곧 돈과 직결된다.
이렇기에 짧은 문장이나 단어로 상대에게 분명한 뜻을 전달하려고 하고 장황한 설명이나 분명하지 않은 말을 지양한다. 그러다 보니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고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뾰족하고 도식적인 언어 선택이 증가하는 듯하다.
이런 흐름은 가정에도 이어져 가족 간의 대화에도 비슷한 패턴의 언어 선택과 구조를 보인다.


또 많은 어른들은 경청하기보다 우리 아이가, 우리 가족이 남들보다 좀 더 명확한 언어 구사력을 통해 상대를 설득하기를 바란다.
이와 더불어 요즘 아이들은 초·중·고등학교 등 통상의 공교육 기관은 물론이고 논술학원 등 사교육 기관을 통하여 특정의 사물이나 정신(견해)을 제삼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시키고 혹은 자신의 견해를 철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표출하는 훈련을 한다.
이러한 부분이 너무 확대되다 보니 적합한 단어 선택이 아닐 경우나 논의 구도가 일반적 관행을 포함하지 않을 경우 경청을 통한 이해보다 지적을 통한 과시를 더 많이 시도한다.


언어라는 것은 배움이 클수록 늘어나는 부분 많아서 독서량이나 학력에 따라서 언어 사용 능력이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또한 사회의 발달에 따라 사용되는 언어도 많은 차이를 보여 음성학이나 기호학적으로도 같은 의미를 갖는 다른 언어가 너무 많아 못 알아듣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호학적으로 혹은 음성학적으로 다르게 표현될 수 있지만 자세히 경청하면 화자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을 법 한데 일반 지역공동체나 가정 내에서도 뾰족한 말을 통하여 전달력만을 강조하고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은 물론 어떤 경우에는 말하는 이가 하고자 했던 취지와 다른 결론에 도달하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