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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Dec 08. 2018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들

파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버스 노선은 27번 버스다.

오페라에서 시작해 루브르박물관, 퐁네프, 룩셈부르그 공원 등등 파리의 주요 관광지들을 지나갈 뿐 아니라

파리에 갈 때마다 늘 묵었던 숙소의 동네가 종점이기 때문에

매일 그 버스를 타고 동네까지 오곤 했다.


그날도 다름없이 27번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창밖을 보고 있던 나에게 누군가 "파흐동"이라며 말을 걸었고 고개를 돌려보니 

한 여자가 나를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나도 그녀를 빤히 쳐다보면서 내가 혹시 노약자석에 앉았나, 뭘 잘못했나 싶어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그녀의 배에 시선이 갔다. 그녀는 임산부였고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한 것이었다. 

물론 그 자리는 노약자석은 아니었다.

어쨋든 재빨리 자리를 양보했지만 나는 그때 그 순간 느꼈던 충격이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나에겐 너무나 큰 문화충격이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물론 우리나라도 임산부에게 자리를 잘 양보해주긴 하지만 사실 대부분은

모른 채 하거나 핸드폰에 집중하거나 잠을 자느라 놓치는 경우가 많다.

한 기사에서 본 어떤 임산부는 임산부가 벼슬이냐라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했고

임산부 표식을 달고 다녀도 그 누구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고된 출근길이 더 힘들었다고도 했다.


우리나라 지하철에는 임산부 배려석이 있지만 그 자리를 비워두는 일은 흔치 않다.

젊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절대 임산부 일리 없는 아저씨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물론 임산부가 오면 자리를 비켜줄 생각으로 앉았겠지만 대부분은 당연히 그 자리를 비워둬야 한다는

생각을 미처 못하는 것 같다.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거나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누가 봐도 임산부인 사람들이 쉽게 자리 양보를 얘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에게 당당히 자리 양보를 요구했던 파리의 임산부가 나에게는 너무나 큰 문화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당하게 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연히 요구해야 하고 당연히 배려해야 하는 일인데

우리는 너무 모른 채 지나쳤던 건 아녔을까.

그렇게 모른채 지나쳤던 것들이 다만 임산부 뿐이였을까.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 임산부들이 좀 더 당당하게 

자리 양보를 요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들을 위한 임산부 배려석에서라도 말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배려받아야 할 사람들이니까.




처음 파리에 갔을 때 내가 놀랐던 또 한 가지는

빨간불일 때 횡단보도에 사람이 서 있으면 차도 멈춘다는 것이었다.


클렉션을 울리거나 창밖으로 소리를 치거나 사람보다 먼저 가려고 하지 않는다.

신호등이 없는 횡당보도에서는 더욱 당연히. 

사람이 서 있으면 차도 멈춘다.

그곳이 좁을 길이던 큰길이던 예외는 없었다. (적어도 내 경험상)


어느 날 문득 파리를 걷다 생각해보니 도로에서 클렉션을 울리는 차량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렉션 소리가 난무하고 좁은 길에서 쌩쌩 달리고 절대 사람에게 먼저 양보란 없는(적어도 내 경험상)

서울에서 온 나에게 그런 배려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실 클렉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 파리는 천국 같았다.


좁은 도로에서 횡단보도가 아닌 곳에 서 있으면 지나가려던 차량이 멈춰 나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한다.

그럼 나는 손을 들고 입모양으로 "메르씨"라고 답한다.

그런 상황들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게 놀라웠다.


그렇다고 파리의 도로 사정이 좋은 건 아니다.

한국보다 훨씬 좁은 도로들이 많고 특히 신호등이 없는 개선문 주변의 나선형 도로는

주말이면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차량들이 얽히고설켜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차가 먼저가 아니라 사람을 먼저 배려를 해준다.



무조건 파리가 좋다고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경험한 몇 가지 일들로 인해 당연하지만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수도 있는 것들에 대한

파리사람들의 배려가 인상깊었다.


우리는 그런 배려들에 대해 너무 인색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작은 배려가 누군가에겐 잊지 못할 순간이 될 수도 있는데.


'또 오해영'이라는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여잔 떠난 남자를 욕하지 않아요. 자기한테 짜게 구는 남자 욕하지."


사랑도 배려고 배려는 또다른 이름의 사랑이다. 

그게 단지 연인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까 짜게 굴지 말자. 그게 무엇이든. 그게 누구라도. 

모든 배려는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아서 더 빛나는 것이다.


miel.may11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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