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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힘찬 Jul 23. 2017

그들의 위로

감성작가 이힘찬

제주에서의 생활 두 달째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감정적으로 힘든 일을 겪었다. 누군가 날 힘들게 했다기보다는, 나 스스로의 부족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버린 탓이었다. 워낙 감정에 예민한 편이다 보니, 감정에 충격을 받으면 늘 쉽게 무너져버리는 나였다.


그때도 그랬다. 한동안 밝게 웃고 있었던 내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제주도에서의 두 번째 달을 이제 막 시작한 때였는데, 그만하고 서울로 올라가야겠구나 싶었다. 내 감정은 내가 잘 아니까, 이곳에 있으면 버티지 못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날, 그런 때.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었고, 서로에 대해 깊이 이야기나눈 사이도 아니었지만, 지난 한 달 간 제주에 머무르며 내 표정, 내 하루를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들. 그런 그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내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이다.




감정적으로 무너졌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아무것도 안 하고 혼자 있는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사람은 자신을 아프게 한 그 일을 계속 곱씹고 곱씹으며 깊은 동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때가 되면, 내 잘못이 아닌 것들도 내 잘못이 되고, 내 아픔이 아닌 것들도 내 아픔이 되어버린다. 나는 나의 나약함을 잘 알기에,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채팅방에, 나의 힘든 모습을 그대로 내비쳤다.

나 역시 동굴 속으로 깊게 빠져들고 있을 그때, 전화가 왔다. 제주에서 알게 된 Y였다. 일부러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보지 않고, 괜찮다고, 그 어떤 것도 당신 탓이 아니라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리고는 고맙다는 나의 말에, 너무도 확실한 음성으로

"고맙긴, 한 달을 같이 지냈으면 가족인데. 안 그래요?"

그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참았던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고맙게도 비가 내렸다. 밖에서 걷고 있던 터라, 비를 맞으며 그 비와 함께 조금이지만 눈물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비를 피해 숙소로 돌아왔는데 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역시 지난달 제주에서 함께 있었던 
H의 전화였다.

"괜찮아?"

너무도 다정하게 물어보는 그의 목소리에 눌렀던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조금만 기다려. 형이 다음 주에 갈게"

분명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인데, 그 한 마디의 음성에는 너무도 강한 힘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그 여운이 오래도록 귓가에 남아있었다. 그 덕에 침대에 앉아 또 한 번 눈물을 쏟았다. 속상해서-가 아니라 고마워서-였다. 세 번째 전화가 왔을 때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 했다. 제주에 있는 동안, 감정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 나눴던 
K의 전화였다.

"무슨 일이야?"

그 말에 대답을 하려는데, 이미 감정이 복받쳐있던 탓인지 말 대신 눈물이 쏟아졌다. K도 그걸 알았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중에 얘기해도 되니까, 오늘은 좀 쉬어"

세 번째 전화까지 받고 나서는, 아파하고 있는 내 모습에 속이 상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고마운 사람들을 알게 되었는데 나는 왜 아파하고 있는 거냐며, 나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마음을 진정시킬 겸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생각을 안 하려고 생각을 하다 보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고, 하지 말라고, 생각과 생각들이 충돌을 일으켰다. 그때, 네 번째로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있었다.

이번 달에도 제주에 함께 머물고 있던 J였다. J와 함께 동네를 걸으며, 제주에 대한 이야기,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걷는 동안, 틀어져있던 내 감정은 어느새 제 자리로 돌아와있었다.

"내일 뭐 하세요? 저는 거문오름 갈 건데!"

고마웠다. 혼자 바보 같은 생각에 사로잡힐 시간을 막아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그리고 미안했다. 내 아픔을 너무 많이 드러내서 신경 쓰이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이 왔다.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 시간들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뒤돌아보고, 다독이는 시간이었고, 부족함을 인정하며 무너져버린 스스로를 더 올바른 모습으로 세워야겠다고 다짐하게 한 순간이었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가진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었다.

다음 날에는 거문 오름으로 향했다. 길게 이어진 길을 걸으며 거칠게 숨을 쉬느라 대화는 많이 나누지 못했지만, 초록빛 숲 속에서 함께 그 풍경을 누리고 그 공기를 나누어 마시는 그 걸음만으로도 충분한 대화였던 것 같다.


그렇게 길게 땀을 흘리고 나서는 바다로 향했다. 갈아입을 옷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발 밑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푸른빛으로 가득한 바다가 내 온몸을, 내 온 마음을 적셔주었다.


불처럼 뜨겁기만 했던 속상한 내 마음은 그렇게, 잔잔한 형태를 되찾았다.




처음 제주에 올 때 나는 분명 혼자만의 시간만을 기대했다. 누군가와의 만남도 교류도, 어울리는 것은 내게 맞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랬던 처음 생각이 미안해질 정도로,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좋은 만남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그들을 배우고, 나를 배우고, 삶을 배우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조금씩 조금씩,
자라고 있다.

2017.07.11 - 에세이 작가 이힘찬
#제주체류 39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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