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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힘찬 Jun 28. 2019

살다 보니 제주살이 2년,
한라산 '백록담'은 봐야지

예비 아빠의 한라산 정복기 (성판악, 관음사, 영실)

어쩌다 보니 2년


2017년 6월, 제주 한 달 살이를 하러 왔다가, 이 핑계 저 핑계로 연장하며 살다 보니 어느새 2년이 되었다. 도시에서의 삶에 지쳐서? 아니면 잘 풀리지 않는 내 삶에서 잠시 도망치고 싶어서? 어떤 이유였건, 늘 내게 소중한 여행지였던 제주로 잠시 떠나 있고 싶었다.


그게 몇 달이 되고, 1년이 되고, 2년까지 오게 될 줄은 정말 예상도 못 했다. 그 2년 동안 이 곳 제주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연애를 하고, 일을 하고 여행을 하고, 그렇게 결혼을 하고, 이제 뱃속의 아이까지 생겼으니 어쩌면 도시에 있을 때 보다 더 바쁘게(?) 살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주에서 2년간 쌓인 추억의 시간들


한라산 정상 한 번쯤은..


아이의 출산을 몇 개월 앞두고, 우리 둘만의 노력으로는 힘들 것 같아서 가족들이 있는 서울로 다시 올라가기로 했다. 배가 더 나오기 전에 이동하려다 보니, 일정도 갑작스레 잡게 되었다. 그동안 제주에 살면서 언제든 원하는 대로 여행을 다녔지만, 막상 열흘 정도 시간을 남기고 나니, 한 번쯤 다시 가봐야 할 곳들 그리고 끝내 가보지 못했던 곳들이 스쳐갔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한라산 정상이었다.


아내는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함께 한라산 정상에 올라 백록담의 멋진 풍경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평소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는 나였기에, 등산에는 당연히 어떠한 욕심이 없었다. 하지만 서울에 살 때부터 '풍경'에는 제법 욕심이 있던 나였다. 한라산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궁금했다. 그래서 2년 전, 아내와 내가 아직 한참 연애 중일 때도 나의 요청으로 함께 시도를 했었다.


그때도 어쩌면 지금과 비슷한 상황. 제주에서 살지, 서울로 돌아갈지 한참 고민하다가 잠시 서울로 물러나기로 했던 때였다. 그래서 서울로 가기 전에 한라산에는 꼭 올라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한라산의 대표적인 등산 코스로는 어리목, 영실, 성판악, 관음사 등이 있다. ( 일반적인 탐방 코스도 몇 개 더 있다).


그중 한라산 정상과 '백록담'을 볼 수 있는 코스는 2종류로, 단계별로 오르다가 막판에 끝장을 보는 '성판악' 코스(4시간 30분)와, 히말라야에 오르는 분들이 훈련(?) 삼아 오른다는 험악한 '관음사' 코스(5시간)가 있다. 물론 이 시간은 편도의 시간으로, 왕복에는 최소 8~10시간이 걸린다.

함께 처음 올랐던 겨울의 한라산 (영실 코스) - 사진 : 이힘찬

그때는 한 겨울이었고, 첫 등산에 정상은 무리일 것이라고 판단하여 조금 더 쉽게 그리고 더 적은 시간에 오를 수 있다는 '영실 코스'를 택했었다. 한참 눈이 쏟아지고 난 후, 아름다운 설경을 기대하며 산에 올랐고, 제법 힘들었지만 하앟게 펼쳐지는 경이로운 풍경 덕분에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다만 3분의 2 지점부터 갑작스레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몸 절반이 하얗게 변해버리는 현상과, 머리카락이 부러지는 대 참사를 겪어야만 했다.  그래도 덕분에 우리는 서로에게 더 꽉 붙어서, 한 걸음 한 걸음 힘이 되어주며, 한라산 첫 등반을 더 뜻깊은(?) 추억으로 남길 수 있었다.



6월의 한라산, 성판악 코스


이번에는 6월이라 눈보라는 없지만 뜨거운 태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는 함께 할 수 없기에, 나 혼자였다. 9시간 10시간 동안 혼자서 괜찮을까, 그 정도의 시간을 내가 걸어본 적이나 있을까, 내 다리가 버텨줄까, 넘어지면 어쩌지-와 같은 걱정들 때문에 같이 갈 사람을 알아볼까 싶었지만 이상하게 이번만큼은 혼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아마도 몇 달 후면 태어날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아빠다운(?) 모습,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저 멀리 보이는 한라산. 저곳을 향하여 출발!

겁이 많은 나는 다녀온 사람들의 글들을 열심히 검색했다. 괜히 무리하다가 아빠 되기 전에 몸부터 상할까 봐, 그리고 얼마 후 이사 때에도 힘을 써야 하는데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ㅎ


그렇게 검색을 하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판악으로 올라가 관음사로 내려온다'는 글을 보았다. 글쓴이의 이유는 대충 '갔던 길로 다시 내려오는 것은 너무 지루하기도 하고, 관음사가 경사는 더 높지만 내려올 땐 괜찮은 편이다'라는 것이었는데, 나도 다녀오기 전에는 그 말이 제법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가장 큰 실수였다.


(*내가 내린 결론 : 올라간 길로 내려오는 것이 편하다.)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281 버스를 기다리며

올라가고 내려오는 길이 다르기에, 차를 가져가는 대신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다행히 제주 버스터미널 근처에 살고 있어서, 시간은 여유로웠다. 성판악으로 향하는 첫 버스는 6시(일반)와 6시 14분(급행)이 있었고, 나는 부지런히 나와서 6시 버스를 탔다.


출발하면서부터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것은 내 가방이 남들보다 좀 더 무겁다는 것. 그 날 가방에 들어있던 것은 - 500ml 물병 3개(물 1, 음료 1, 얼음물 1), 와이프 표 도시락 3개(유부초밥, 참외, 오이), 간식 6개(초코바, 맥스봉 등), 스포츠 타월, 손수건, 보조 배터리, 물티슈, 레인커버, DSLR 바디와 렌즈 2종, 바람막이, 핸드폰, 지갑 등 - 으로, 다른 것보다는 카메라와 렌즈가 제법 무게를 차지했다. 그래도 뭐, 쉬엄쉬엄 가면 괜찮겠지 싶었다.

한라산 성판악 휴게소 앞 - 사진 : 이힘찬

정상까지 갔는데 하늘이 흐리거나, 백록담을 찍지 못한다면 카메라를 들고 올라간 내가 원망스러웠을 텐데, 감사하게도 하늘은 너무나 맑았다. 나는 설레는 마음 반, 걱정되는 마음 반으로 한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는 길에는 카메라 촬영은 최대한 참기로 했다. 내 체력이 어디서 바닥날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은 오르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오르는 구간의 사진은 '해발 ㅇㅇㅇm' 인증샷이 거의 전부... 성판악 코스는 진달래밭 대피소 전과 후로 구분되는데, 그전까지는 제법 완만한 코스로 쉬엄쉬엄 오르면 크게 무리될 게 없었다. (하지만 나는 30분도 안돼서 이미 헥헥거리고 있었다;). 혹시 너무 타지는 않을까 걱정하여 온 몸을 가리고 오르기 시작했는데, 대피소 전까지는 계속 숲 속을 걷는 느낌이라 딱히 햇빛에 노출될 일이 없었다.

한라산 성판악 코스를 오르며 찍은 해발 900M~1600M


진달래밭 대피소부터가 시작


진달래밭 대피소에는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중간에 잠깐 숨을 돌리는 정도 외에는 그냥저냥 오르다 보니 2시간 3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시작이라는 얘기를 워낙 많이 들었던 터라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제주 한라산 성판악 코스의 진달래밭 대피소 - 사진 : 이힘찬
제주 한라산 성판악 코스의 진달래밭 대피소 - 사진 : 이힘찬
제주 한라산 성판악 코스의 진달래밭 대피소 - 사진 : 이힘찬
아내가 싸준 유부초밥 도시락

6시 40분에 출발하여, 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은 9시 10분. 5시에 아침을 먹어서인지 배가 조금 고팠다. 대충 빈 공간에 주저앉아 잠시 쉬면서, 아내가 싸준 유부초밥 도시락을 꺼내 허겁지겁 집어 먹었다. (*역시 땀 흘린 뒤에 먹는 밥은 꿀맛. 아내표 도시락이라 더 꿀맛!)


이제부터 고비인데 조금 더 쉴까..? 하다가, 더 쳐지기 전에 출발하는 것을 택했다.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 정상을 향하여 - 사진 : 이힘찬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 정상을 향하여 - 사진 : 이힘찬

확실히 대피소 전과는 다른 경사였다. 그전까지는 대부분 데크가 잘 깔려있거나, 경사가 잘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오르막이었는데, 대피소 후부터는 망치로 바위를 부숴놓은 듯한 울퉁불퉁한 돌길이 많았다. 계속되는 계단의 경사도 제법 높았고, 무엇보다 그늘이 없어 햇빛이 너무나 뜨거웠다. 하지만 바람막이를 벗을 수가 없었다.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이 굉장히 차가웠기 때문. 6월 말인데 이렇게 차가운 바람이 불다니... 초보 등산러인 나에게는 모든 것이 충격이었다.

조금만 더 힘내자 - 사진 : 이힘찬

정상이 어디쯤인지 눈으로 보고 나면 좀 더 희망이 생길까 싶어 앞을 올려다봤지만, 깨알같이 작은 사람들이 높이 높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힘이 더 빠졌다. 나보다 한참 뒤에 있던 사람들은 벌써 내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앞서 가고, 물병 하나만 손에 들고 성큼성큼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고...


그쯤 되니 내 가방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한라산 풍경을 보여준다는 핑계로 아내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잠시 찡찡거리고 난 후, 다시 마지막 힘을 짜내어 발을 내디뎠다.

한라산 성판악 코스를 오르며 찍은 해발 1700M~1900M


한라산 정상 '백록담'


몇 번쯤 걸터앉아 거친 숨을 몰아쉰 후, 드디어 한라산 정상에 도착했다. 그때의 시간은 11시.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시간과 거의 비슷하게 도착한 것을 보면 그래도 내가 평균(?) 이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인증숏을 찍고 있었다. 대피소가 아닌 정상에서 자리를 펼치고 식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그분들이 조금 대단해 보였다. 이렇게 찬 바람이 쌩쌩 부는데서 식사라니... 나는 이미 바람을 너무 맞아서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제주 한라산 정상 '백록담' - 사진 : 이힘찬

난간에 서서 백록담을 내려다본 순간, '아..' 하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올라오는 길에 느꼈던 고통을 모두 잊어버렸다. 너무나 경이로운 풍경,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아름다웠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맑아졌고, 만족스러웠다. 올라오며 헥헥거렸던 순간이 모두 위로가 되었다.


거센 바람이 계속 머리를 흔드는데도, 백록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곳은 한라산 정상이었다. 다시 내려가야 등산이 끝나는 것이겠지만, 아무튼 나는 정상에 도착했고, 백록담을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커다란 시험을 통과한 기분이었다.

제주 한라산 정상 '백록담' - 사진 : 이힘찬
제주 한라산 정상 '백록담' - 사진 : 이힘찬

이제 아내에게 연락을 할 차례였다. 사실 아침에 출발하기 전에 가방 속에 몰래 챙겨 온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아내를 똑 닮은 너구리 인형. 아내의 활동명은 '너굴양'으로, 너구리를 닮아서 고교시절에 친구가 지어준 별명이다. 언젠가 내가 약속 시간을 기다리다가, 그녀와 너무도 닮은 인형을 발견하여 사서 선물한 적이 있었다. 아내는 그 인형이 마음에 들었는지 집에 있을 때 항상 끌어안고 있었다.

한라산 정상에 아내와 함께 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기에, 아내를 한 번 웃게 해 주자는 마음으로 아침에 몰래 그 인형을 가방 속에 챙겨 왔다. 그리고 백록담과 함께 셀카 인증샷! 다행히도 아내의 반응은 최고였다.


"인형 뭐야!!ㅋㅋㅋ 나 정말 같이 간 것 같아~"




풍경이 아름다운 관음사 코스, 하지만


한라산 정상에는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아니,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도 더 바람이 차가웠고, 강했다. 점점 머리가 아파왔고 그곳에 앉아 있어도 쉬는 기분이 들 것 같지는 않았다. 사진을 찍고 SNS 올리며 20분 정도 머물고는 다시 출발했다. 내려오는 길은 인터넷에 봤던 대로, '관음사 코스'를 택했다.

한라산, 관음사 코스로 내려오는 길 - 사진 : 이힘찬

내가 느낀 관음사 코스의 장점은, 내려오는 내내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맑은 하늘과, 독특한 숲의 형태와, 저  너머로 넓게 펼쳐진 제주의 풍경 덕분에 눈이 심심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큰 단점이 있었다(초보 등산러 입장;). 일단 길이 너무 험하다는 것. 풍경을 보며 내려가기에는 경사가 너무 높고 바닥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물론 다치지는 않았지만, 등산화를 신었음에도 발이 몇 번이나 꺾여 다리에 무리가 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땡볕 구역. 그늘진 길이 거의 없어서 쉼을 취할 장소가 없었다. 이미 산에 오르며 체력이 바닥난 탓에 내려오는 길에 몇 번이나 한계와 마주했다. 그제야 산은 내려올 때가 더 힘들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그래도..ㅎ 풍경만큼은 인정! 나무 그늘 아래서 숲길을 걷는 조금은 심심한 성판악 코스와 달리, 언덕을 넘기도 하고 방향을 틀기도 하며 넓은 풍경을 둘러볼 수 있어서 눈이 정말 즐거웠다.

한라산, 관음사 코스로 내려오는 길 - 사진 : 이힘찬
한라산, 관음사 코스로 내려오는 길 - 사진 : 이힘찬
한라산, 관음사 코스로 내려오는 길 - 사진 : 이힘찬
한라산, 관음사 코스로 내려오는 길 - 사진 : 이힘찬

관음사 코스가 가장 미웠던 순간은.. 내려오는 길이라서 '오르막'은 잊고 있었는데, 3번이나 나타난 제법 경사 높은 오르막 길! 하산 코스에 오르막 길은 정말 반칙 아닙니까..? 아마도 하산하면서는 10번 정도 멈추어 쉼을 취했던 것 같다..ㅎ


그렇게 입구까지 무사히 도착하고 나서 시간을 보니 3시 40분. 총 9시간의 등반이었다. 다리는 후달거리고, 가방 때문에 어깨는 쑤셔오고, 발바닥에는 불이 나고 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정좌에 드러누워서 바로 아내에게 연락을 했다.


"탈출!"


내려오는 길에 만난 분께서 찍어주신..ㅎ
힘들지만 웃으며..!

예비 아빠의 도전이라는 마음으로, 멋지게 다녀오고 싶었던 나의 한라산 등반은 그렇게 나약한(?) 엔딩을 맞이했다. 사실 그날 등산을 하며 만난 사람들의 모습은 대부분 여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30분 만에 지친 나에게 9시간의 등반은 정말 히말라야급 도전이었다. 더 강한 모습으로 다녀오지 못해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그래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내에게 기특하다고 칭찬을 받았으니, 그래! 난 그거면 됐다!!




에필로그


한라산 정상에서 바람을 맞고 온 너구리 인형은 아내에게 더 사랑받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이틀이 지난 오늘까지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비명을 지르던 어제보다는 나은 상태..? 이사 전까지는 회복되기를..ㅎ


어찌 됐든, 한라산 정상의 풍경은 정말, 정말 아름다웠다. 언젠가 다시 한번 도ㅈ... 아니다, 그곳에 내가 다시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제 며칠 후면 제주를 떠나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시작. 이곳에서 누리든 것들이 많이 그리워질 것 같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쌓은 추억들을 발판 삼아, 더 즐겁게, 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제주살이 2년 차,

예비아빠 초보 등산러의

한라산 등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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