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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경 Dec 24. 2023

김연경과 김연경 上 - 가마쿠라 쓰루가오카하치만구

혼자지만 도쿄 여행합니다 06.


- 차 례 -

1.고래와의 만남

2.토신과 여우

3.추가 여행 정보(가마쿠라역 대탐방)

 


 



당신의 고래에게 닿기를 바라며

 



가마쿠라 고료 신사. 고쿠라쿠지역에서 내려 걸어가다 보면 보이는 보물 같은 곳.

1.고래와의 만남


결국 일본의 여름에 당하고 말았다. 

나는 도쿄 근교 가마쿠라에 있었다. 에메랄드빛 시치리가하마해변을 눈에 담은 후 마치 세트장처럼 아기자기한 고쿠라쿠 지역, 하세역, 가마쿠라역까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구경했다. 스마트폰에 뜬 오늘 걸음 수는 어느새 3만 걸음을 향해 가고 있었다.


온몸이 찝찝할 정도로 땀이 흘러내리는 여름 날씨. 무려 새벽 여섯 시에 초밥 오마카세 오픈 런을 하고 바로 가마쿠라로 건너온지라, 도쿄 신주쿠로 가는 초록빛 에노덴 열차의 푹신한 의자에 앉자 물에 젖은 거대한 솜처럼 의자에 빨려들 듯이 푹 가라앉았다. 그야말로 더위와 졸음에 KO 당한 느낌이랄까. 일본의 여름에 제대로 당했다. 전철 창밖의 근사한 해변 경치를 보기 위해 열차 내에서 자리를 옮기는 외국인이 있었지만 난 미동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더위와 피로를 없애겠다는 듯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기분 좋은 시원함에 눈을 떴다. 무거운 눈꺼풀을 쌈빡쌈빡 움직여 앞을 봤는데 이게 웬일. 초록색 에노덴 전철이 해변 속으로 빠지기라도 했는지 열차 안은 물로 가득 차 있었다. 놀랄 법도 한데 내 쌍꺼풀진 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재난 영화처럼 열차가 물에 빠져서 어푸어푸, 괴로워하는 게 아니라 눈 앞에 펼쳐지는 물방울이나 물결 표시가 영화 <벼랑 위의 포뇨>에 나오는 물처럼 그림 같이 출렁여서 묘하게 귀여웠다. 또 물이 섬뜩하게 차갑지 않고 미지근해서 싫지 않았다.

 

그때, 눈 앞에 미끄덩한 무언가가 불쑥 나타났다. 그제야 살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더니 뭉뚝하게 입이 나온 생물체가 선명하게 보였다.

고래였다.

에노덴으로 찾아온 고래. ©pixabay

바다를 시원하게 누비는 고래를 평소에도 좋아했던지라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쿠아리움 돌고래 쇼에서 본 돌고래보다 큰 몸집에 두 손은 공손하게 인사하는 듯 가지런히 모아져 있다. 거대한 몸집에도 손을 모으고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귀엽게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처연하고 깊은 눈동자 때문에 괜히 나까지 진지해졌다. 


동그란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보던 고래가 입을 우물거리더니 말했다.



“고래… 이루카…”



마치 나에게 어떤 언어로 말할지 정하라는 듯 고래와 이루카(돌고래의 일본어)를 몇 번 읊조렸다. 커다란 고래에… 발음이 귀여워서 좋아하는 단어인 이루카에… 푸른 바다에… 내가 좋아하는 것만 나오는 꿈인가? 

내가 대답하지 않자 고래는 이내 결심한 듯 입을 벌리고 뜬금없는 말을 했다.


 

“… 요새 견딜만합니까?”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고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요새 견딜만합니까? 나는 알아요. 당신이 우영우는 아니지만 날 좋아한다는 걸. 좋아하는 무언가를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질 정도로 절박한 것 아닙니까?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나 힘들게 했습니까.


당신이 도쿄에 와서 한 생각은 제가 당신 머릿속을 유영하면서, 헤집으면서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모두 파악했습니다. 시치리가하마 해변을 볼 때는 오래 만난 남자 친구와의 작별을 떠올렸고 우에노 공원 옆 코메다 커피 전문점에 있을 때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곳에서 일하던 자신을 회상하더군요.

당신은 혼자 도쿄에 와서 인생을 찬찬히 돌아봤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당신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과거에 얽매이기도 하고 대롱대롱 눈물짓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여행을 해서라도 쌓인 고뇌를 털어 버리고 다시 뚜벅뚜벅, 아득바득 인생을 걸어 나가려고 하더군요. 그렇게까지 해서…


 

왜 사는 겁니까?

왜 살아요?

어떻게 살아요?



고래는 몸의 방향을 살짝 틀고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은 지금까지 바다를 제 세상인 듯 누비고 수면 위로 올라가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튀어 오르는, 사람들의 눈길을 자못 사로잡는 저의 모습만 생각했겠죠. 어지간한 크기와 지능으로는 제 근처에도 감히 오지 못하는 바닷속 생물들의 모습에 그저 감탄만 했겠죠. 그러나 물에서만 살 수 있는 저의 자리는 안타깝게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커다란 제 친구를 피투성이로 만들어 숨통을 끊은 후 떡하니 들어 올리고 웃으며 사진을 찍은 적이 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어선과 부딪치거나 바다가 오염되면서 떠밀려 내려와 다시마 양식장에 콕 박혀 죽어 버린 적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죠. 당신이 그곳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저도 물에서만 살 수 있어요. 단 하나뿐인 삶의 방식이 위협받고 있어요.

신주쿠행 에노덴을 탑승하기 전.
에노덴 하세역. 주변의 아기자기한 건물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왜 사는지,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태어난 김에 산다’는 말은 이제 나를 납득시키지 못해요. 더러워져 가는 내 보금자리에서 이를 꽉 물고 견디기 위해서는 심지가 꺾이지 않을 단단한 정신력이, 신념이 필요했어요. 고래 무리에 껴서 그럭저럭 살아갈 순 있겠지만 혼자서도 부러지지 않고 나를 지탱할 정신적인 기둥이 꼭 필요했어요.


우리를 멈추지 않고 기어가게라도 해주는 정신적인 원동력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애틋한 사랑? 누군가를 지켜야겠다는 희생정신?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 누군가에게 영감과 영향을 받는 존경심? … 무엇 하나 빠지면 허전하지만 모두 가지는 건 어려울지도 몰라요.

이 중 하나를 뺀다면 당신은 무엇을 포기하겠습니까? 오늘도 꿋꿋이 살아가는 당신의 의견이 무척이나 궁금해요.”


말을 마치고 고래는 뭉뚝한 입을 닫았다.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 존경하는 사람은 없어도 그나마 괜찮지 않을까요? 항상 함께 있는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크고 딱히 없어도 살아갈 순 있잖아요. 슬프기는 하겠지만요. 반면 사랑은 없으면 죽을 만큼 삭막할 테고, 자기 아이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고 함께하는 데서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들은 꽤 봐서.”

“삐에에엑!!!!”


난 왜 자연스럽게 고래와 대화를 나누는 걸까. 아니,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다.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래는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 빼액 소리를 질렀다. 바닷물조차 둘로 가를 듯한 고래의 처절한 목소리. 입이 절로 벌어지고 팔에 소름이 돋았다.


동그랗고 검은 눈이 이번에는 나를 꿰뚫듯이 쏘아보았다.


“나 참,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나와는 생각의 차이가 있군요. 존경하는 사람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만.”


답정너 고래인가? 어차피 자기 의견이 옳다고 분노할 생각이었으면 왜 나한테 물어봤을까? 조금 전까지 선해 보이던 고래의 눈매가 밉게 보였다. 하지만 고래의 울음소리가 너무 무서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고래는 입을 다시 열었다.


“당신은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가족, 옛날 위인, 옆집 사는 친구, 온라인 친구, 연예인, 그 누구도 상관없습니다.”

“아아, 그, 네. 누구냐면…”

“아니, 생각해 보니 당신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난 당신의 머릿속을 다 읽었다고 했잖아요. 분명 당신과 이름이 같은 그분을 존경하겠죠. 게다가 당신은 그분을 고래처럼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왜 그분을 존경하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분은 자신의 바다, 터전에 답답한 공기를 없애겠다는 듯 말도 안 되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해 고래처럼 시원한 물을 주위에 내뿜는 사람입니다. 생각만 해도 상쾌해지죠. 바다에 미치는 영향력이 어찌나 큰지 그분이 사라진 곳의 바다는 손질 안 한 화분처럼 말라비틀어질 때가 많습니다. 화제의 중심이 되기에 온갖 잡다한 일에도 도마 위 고래처럼 올려져서 난도질당할 뻔한 적도 많았지만, 거대한 몸집으로 모두 소화해 버렸죠.


그분은 편의상 ‘고래’라고 칭하겠습니다. 당신은 처음에 고래의 이미지만 보고 제멋대로인 사람일 거라며 무서워했어요. 그러나 바닷속에서 고래 심줄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고집과 팀원들을 위해 나서서 희생하는 모습에 마음을 활짝 열었죠. 아- 아- 비록 함께하지 못해도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상이 있다는 것만으로 삶이 어찌나 다채로워지던지- 고래가 슬픈 일을 이겨내고 다시 큰 소리로 외치며 비상할 때는 당신도 아픈 과거를 청산하고 일어나겠다고 다짐했어요. 고래의 시원시원하고 과감한 움직임은 당신에게 없는 모습이기에 남몰래 대리만족도 했어요.


덕분에 외로워도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으면서. 살아 보자고 굳게 다짐했으면서. 당신 좋을 대로 위로받았다가 시간이 흐르면, 눈에서 멀어지면 그때 얼마나 고마웠는지, 행복했는지 깡그리 잊어버리고 또 낑낑거리며 힘겹게 살 참인가요? 당신은 행복한 일보다 나쁜 일만 기억에 남겨둘 때가 많잖아요.


당신은 고래의 소중함을 더 알아야 해요. 행복한 순간을 더 기억할 줄 알아야 해요.

 



후지사와역. 가마쿠라와 도쿄에 오가려면 거쳐야 하는 역이다.

고래의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뜨자 영화의 장르가 바뀌듯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난 여전히 에노덴 전철의 초록색 좌석에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커트 머리 일본 여자가 조금 전의 나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머리 위 표지판을 보니 종점인 후지사와(藤沢)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더는 고래가 기억나지 않았다.




2.토신과 여우

여행 마지막 날에는 공항으로 갈 때 '스카이라이너'를 탔다. 도쿄에 발을 디딘 첫날에는 공항에서 도심으로 향할 때 '게이세이 스카이액세스 특급열차'를 이용했지만 속도를 비교하자면 스카이라이너가 가장 빠르다. 하지만 그만큼 가격이 높다.


비싼 만큼 생김새부터 남다르다. 앞부분은 깔끔하게 떨어지는 곡선으로 마무리되어 있고 열차 색도 짙은 푸른색이어서 마치 날렵한 고래와 같다. 숙소인 아사쿠사와 가까운 우에노역에서 친절함이 뚝뚝 묻어나는 역무원의 설명을 듣고 스카이라이너 표를 구매해 탑승했다. 몇 번 타봤던지라 익숙하게 열차 내 수하물 보관하는 곳을 지나쳐 널찍한 맨 뒷자리에 앉았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스카이라이너 내부에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서 있는 한 일본인과 아이, 자리에 앉아 부산하게 짐을 정리하는 외국인 여자 한 명만이 있었다.

스카이라이너. 굉장히 쾌적하다.

답정너 고래(구별을 위해 꿈속 고래는 '답정너 고래', 우상은 '고래'라고 부르겠다)에게 어지간히 미움을 샀는지 꿈에서 깬 후 실제로 나의 우상, ‘고래’에 관한 기억이 깡그리 사라졌다. 답정너 고래가 초음파로 머리에 무슨 짓이라도 한 걸까?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내가 그 사람을 왜 좋아했지'라는 생각만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찝찝하기 그지없었고 한편으로 눈부시게 빛나고 소중한 기억을 잃은 듯해 씁쓸했다.


천만다행으로 나 김연경은 강박적으로 기록하는 여자였다. 수첩이 없을 때는 영수증 뒷면에도 도쿄 여행의 잔상을 적어둘 정도로 순간순간을 놓치기 싫어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이 있듯이 ‘남는 건 글뿐’이라는 공식이 김연경에게는 적용되는 듯했다. 블로그에도 고래를 향한 사랑이 듬뿍 느껴지는 글을 어찌나 많이 썼던지.


심지어 검은색 커다란 숄더백 안에는 도쿄를 여행하며 고래에게 쓴 편지도 몇 통 들어 있었다. 드라마 <더 글로리>의 동은이처럼 연진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쉼 없이 편지를 쓰는 것도 아니고 고래에게 편지까지 써야 하나 했지만, 어찌 됐든 기억을 잃은 지금은 소중한 자료다. 게다가 상대가 가족이든, 연인이든, 무형의 무언가이든 그 사람을 생각하며 쓴 진솔한 편지가 지닌 힘은 가히 폭발적일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스카이라이너 좌석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편지를 열어보았다.




고래야! 난 지금 9월 더운 여름날, 가마쿠라 쓰루가오카하치만구 앞 돌계단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어.”



고래 선수님도 아니고 고래 님도 아니고 고래야?? 누가 보면 둘도 없는 사이에 절친인 줄 알겠다. 편지 첫머리부터 버릇없는 말투에 기가 찼지만 이 글을 당사자가 설마 읽겠나 싶어 다시 글로 시선을 옮겼다.


“‘쓰루가오카하치만구’라는 이름이 너무 어렵지? 히히. 나도 같은 생각이야. 도쿄 근교인 가마쿠라의 가장 끝 역인 가마쿠라역에서 내려서도 한참 끝으로 걸어가서 고마치도리 거리를 지나면 나오는 신사야. 예상외로 광활한 신사라서 놀랐어. 사실 가마쿠라는 전철도, 집도, 거리도 아기자기한 곳이 많았거든. SNS에서 일본 감성 명소로 나올 법한 곳들이랄까? 아까 산책하면서 고쿠라쿠지역도 봤는데 역은 작지만 푸른빛 나뭇잎과 역 앞 우체통, 초록색 표지판이 어찌나 조화롭게 잘 어우러지던지… 너도 분명 한눈에 반할 거야.

고쿠라쿠지역.

쓰루가오카하치만구는 규모가 커서 1년 내내 일본인과 외국인 관광객이 줄을 잇는대. 그래서 평일인데도 예쁜 기모노를 입고 자갈이 깔린 길을 걷는 사람들, 편안해 보이는 흰색 셔츠와 남색 바지로 된 교복을 입고 수학여행 온 학생 수십 명, 길게 부적을 진열해 놓고 판매하는 무녀 옷을 입은 직원까지 사람 보는 재미가 쏠쏠했어. 난 혼자만의 잔잔한 시간을 좋아하지만 적당히 북적이는 신사도 좋아하나 봐. 넌 어때? 확실한 건 넌 키가 커서 기모노 체험을 하면 엄청나게 길이가 긴 기모노를 입어야겠네. 하하.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예쁠 거야.


이곳은 가마쿠라 막부를 탄생시킨 무장이 지은 신사인데, 일본에서 수호신, 무예의 신으로 숭배받는 ‘하치만(八幡)’ 신을 기리며 세웠어. 많은 무장이 수호신의 가호를 받기 위해 세워진 이곳에서 수치화할 수 없는 정신적인 지지를 받았을 테야. 사람은 본디 불완전한 존재잖아. 같은 사람과 부대끼면서 구원받을 수 없다면 신에게 기대야지. 어째서 하늘은 사람을 완벽하지 않고 티끌만큼의 불완전함이라도 지니게 만들었을까? 왜 불완전하게 만들어서 신에게 기대게 만들고, 우리를 고뇌하게 만들고, 서로 마음으로 얼굴을 맞대고 부둥켜안으면서 위로하게 만들었을까.

쓰루가오카하치만구를 찾아온 학생들.

미생에서 완생으로 향하는 사람의 덧없는 불완전함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동화가 있어. <토신과 여우(土神ときつね)>라는 1934년에 발표된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야. 동화답게 신인 토신, 동물인 여우, 식물인 자작나무가 주인공이지.


토신은 신이라도 너무나 부족한 점이 많아. 좋아하는 자작나무 앞에서 '풀은 검은 흙에서 나오는데 왜 푸른지, 노란색, 흰색 꽃까지 어떻게 피우는지' 같은 엉뚱한 질문을 하고, 플러팅 축에도 못 끼는 형이상학적인 소리나 하는 신이야. 생긴 건 말해 뭐 해. 질퍽질퍽한 습지 안에 살면서 눈은 빨갛고, 손톱과 발톱은 까맣고 보기 싫게 길어. 심지어 성격까지 난폭하면서 자작나무를 좋아하는 마음만은 주체하지 못하지.


토신과 정반대인 갈색 여우는 우리가 익히 여우 하면 떠올리는 영악한 이미지를 생각하면 돼. 자작나무를 좋아하지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품위 있는 척하느라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해. 밤이 깊었을 때 자작나무와 은하수를 바라보며 똑똑한 척 항성, 행성을 거론하고, 망원경을 주문했으니 다음에 함께 보자는 새빨간 거짓말을 해. 그러면서 속으로 자책하지. ‘아, 난 단 한 명의 친구에게 또 무심코 거짓말을 해버렸어. 난 진짜 큰일 날 놈이야. 자작나무를 기쁘게 해주려고 한 말이니 나중에는 진실을 제대로 전하자’면서.


토신과 여우의 사랑을 받는 자작나무는 잎이 부드럽고 줄기는 번들번들 검게 빛나는 아름다운 나무야. 거짓말쟁이 여우에게 속아서 솔직하기 그지없는 토신보다 여우를 더 좋아해. 상대를 골라내는 눈이 부족하달까. 그리고 땅에 우뚝 박힌 채 나뭇잎만 파르르 움직이는 수동적인 존재지.


이토록 불완전한 세 존재지만, 특히 토신은 자작나무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너무나 외롭고, 한없이 답답하고, 생각만 하면 폭발할 듯이 슬프고, 그러다가 자작나무를 보러 갈 때면 마음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뒤바뀌어 두근두근 설레기 시작하고, 하지만 자신이 서 있고 싶던 자작나무 옆자리에 떡하니 있는 여우를 보고 절망해. 자신을 멀리하고 무서워하는 자작나무를 보고 슬퍼해. 자작나무와 여우의 대화를 듣던 토신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정신없이 북쪽으로 뛰어가. 그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큰 소리로 엉엉 울어.

쓰루가오카하치만구의 입구 쪽.
쓰루가오카하치만구. 부적과 길흉을 점치는 제비뽑기가 있다.

결국 동화치고 꽤 섬뜩하게 결말이 나는데(스포는 안 할게. 하하) 나는 신이지만 생김새와 마음이 모난 토신의 눈물을 보고 덩달아 엉엉 울었어. 타인이라는 존재 때문에, 사랑받지 못하는 바람에 기분이 최고조에도 달했다가 땅속 끝까지 처박히기도 하는 토신이 마치 과거의 나 같았거든. 


고래야,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건 너무 슬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미움받을 용기를 낼 때도 있지만 마음 깊숙한 한구석에서는 사람에게 버림받으면 절망의 심연에 빠질 나를 알고 있어. 그래서 혼자 다닐 때도 많고.


고래야, 넌 불완전한 세 존재 중에 누구와 가장 가까운 것 같아? 널 존경하는 나는 셋 다 너와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잖아. 네가 가깝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분명히 있을지도 몰라.


나는 처음 읽을 땐 토신에게 가장 공감했는데, 두 번째 볼 때는 잘 보이고 싶은 존재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여우의 모습도 조금 와닿았어. 나부터가 내면에 다양한 성격을 품고 있는 거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래 가사처럼. 하하.


다양한 모습을 지닌 사람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파악하려는 것,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몰라. 혈액형을 뛰어넘는 정확성으로 주목받은 MBTI도 유행했지만 결국 우리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 뿐.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고 나 자신도 몰랐던 소름 끼치는 모습이 언제, 어디서 발현될지 몰라.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빙산의 일각만 보이는 사람이 수두룩한 이곳에서도 당신은 나를 살게 한다는 것. 내가 사는 이유를, 의미를 어렴풋이 비춰준다는 것, 꿈꾸게 한다는 것. 행복의 잔상을 떠올리게 해준다는 것.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


고래, 너의 존재에 오늘도 감사해.

그걸 부디 잊지 말아 줘.


마지막으로 저번에 네가 한 말처럼 건강해야 뭐든지 할 수 있어. 항상 건강 조심해. 또 연락할게.


-연경이가”



스카이라이너의 덜컹거리는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들으며 편지를 읽은 나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 얼굴을 들었다. 앉은 좌석 옆 창문에 내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이 정도면 고래는 존경의 대상을 뛰어넘어 사랑하는 존재가 아닌가.

아니, 존경에서 사랑으로 발전한 건가.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런 편지를 써놓고 꿈속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존경하는 사람을 버릴 수 있다고 한 내가, 당연하게 여긴 내가 미워졌다.

우리는 가끔 사랑하는 자의 소중함을 너무 쉽게 잊곤 한다.



어느새 스카이라이너는 우에노, 닛포리를 지나 나리타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3.추가 여행 정보

(블로그에 발행한 자료를 정리해 넣을 계획이며, 필요시 도쿄에 다시 방문 후 필요한 부분을 추가할 예정입니다.)

가마쿠라역 대탐방

https://blog.naver.com/inpikaaa/223298179403

고료 신사의 입구에 있는 표지판.
가마쿠라역 근처 소바집에서 먹은 세트 메뉴.
쓰루가오카하치만구의 부적. 교통 안전을 위한 부적을 구매했다.
'하토사브레'라는 비둘기 모양 사블레가 유명한 곳. 가마쿠라의 명소다.

블로그도 있어요: https://blog.naver.com/inpika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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