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부산으로 돌아오는 날은 하얀 구름도 아름다웠다. 비행기 창가 자리에 앉으니 작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폭신한 비단 이불과 같은 구름. 그러나 구름을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져서도 고래를 향한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존경하는 사람을 만들지 않으면, 신성시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삶. 비록 함께하지 않더라도 함께 세상을 살아가며 힘을 주는 존재가 필요했다. 나의 우상인 고래 외에는 누가 나에게 정서적인 안정을 주었지? 인물은 달랐지만 모두 존경할 부분이 있었다. 우상의 대상은 옛날 위인이기도, 친구이기도, 연예인이기도, 운동선수이기도 했다. 그들은 십 대 때 나의 미래를 결정지었고 삼십 대에도 굳건하게 나의 연약한 정신을 지탱해 주었다. 물론 나의 기대와 달리 우상은 시간이 흘러 막장 이상으로 망가지기도 했고, 여전히 똑같이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기도 했다.
항상 내 멋대로 누군가를 우상으로 삼고 좋아하고 시간이 지나면 멋대로 잊고... 그들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내가 존경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은 언제나 필요했다. 그리고 존경과 사랑의 농도는 지금 나의 우상, 고래가 가장 짙었다.
당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마음의 크기가 크든, 작든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좋다.
고래에게 보내는 다른 편지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두 번째 편지
“고래야, 네가 국가 대표를 은퇴한 뒤 배구의 인기가 주춤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네가 나오는 국내 경기는 여전히 매진 세례더라. 진심으로 리그 전체의 열기가 더 뜨거워졌으면 좋겠어.
배구는 원래 고래 네가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인기 있는 겨울 스포츠는 아니었잖아. 네가 압도적인 실력으로 해외에서도 주목받으면서 인기가 높아지기 시작했지. 고래 네 덕분에 듬성듬성하던 관중석이 진달래꽃이 가득한 꽃밭처럼 아름답게 가득 찼어.
고래 넌 배구를 할 때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은 신과 같았어. 아니, ‘같아’. 범접할 수 없는 GOAT(Greatest of all time)랄까. 마치 바다를 지배하는 고래처럼 등장만으로도 경기장 전체를 제압하고 관중을 사로잡았지. 손가락으로 세기도 힘들 정도로 긴 시간을 경기장에서 뛰면서 고래의 아름다움을 시기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보란 듯이 꿋꿋하게 실력으로 바다를 평정했어.
‘고래 너조차 입에도 못 담을 심한 일을 겪을 때가 있는데 내가 지금 겪는 일은 힘든 것도 아니야. 이겨내자.’
고백할게. 위의 문장을 되새기면서 네가 겪은 아픔과 역경을 나의 경험에 비추어 위로받은 적도 있어. 너의 슬픔에 위로받아서 미안해. 하지만 그만큼 난 너의 슬픔에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기도 하니까 용서해 줘. 넌 나에게 희로애락 그 이상의 폭발적이고 격렬한 감정을 주는 사람인걸. 그만큼 보석처럼 단단하고 소중한 사람인걸.
넌 힘든 일이 있어도 얼마 뒤면 툭툭 털고 일어나서 아무렇지 않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더라. 오히려 미래에 배구가 더 반짝거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도전하는 과정을 보여 주더라. 너처럼 결과만큼 과정도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까. 아- 고래 너를 보니 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싶어져. 너도 경기 때 마지막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포기하지 않잖아.
하지만 혹시 나에게, 팬에게 보이지 않는 수많은 시간 속에서 너무 힘든 적은 없었니? 도전하고 바라던 바를 이루는 과정 속에서 어떠한 감정을 느꼈니? 네가 선택한 것에서 인생을 사는 의미를 찾았을까?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은 찾았을까?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이 넌 지혜롭고 똑똑하게 네 인생의 무게를 책임지겠지만 말이야.
나는 내 삶에서 이러한 질문의 해답을 알아내지 못했지만, 자신만의 나침반을 들고 인생을 나아가는 너의 발걸음이 무조건 행복으로 이어지길 바라.”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시부야의 상징으로 자주 거론된다.
#세 번째 편지
“언제 시부야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을까? 골똘히 생각해 봤는데 도저히 그 시작점이 떠오르지 않아. 어느 날 갑자기 시부야라는 단어를 알게 된 느낌이랄까? 하하. 시작점은 떠오르지 않고, 시부야의 상징인 한 번에 최대 삼천 명이 우르르 건너는 스크램블 교차로, 어린 시절부터 뭉클한 이야기로 날 울게 한 충견 하치코의 동상… 실제로 눈에 담은 풍경, 매체, 책이 남긴 잔상만이 떠오를 뿐이야.
전 세계에 내로라하는 유명한 곳은 보통 그렇지 않을까 싶어. 언제 이곳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새 내 머릿속에 자리 잡는 곳. 가보지 않았지만 이름은 모두 알고 있는 곳. 시부야에서 쇼난신주쿠라인 전철을 타면 바로 갈 수 있는 신주쿠도 비슷해.
이때 난 신주쿠에서 요즘 인기가 있다는가부키초 타워를 가던 중이었어. 그런데 어느새 어둑어둑한 저녁, 높은 오피스 빌딩만 가득한 곳에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발견했어. 스마트폰 지도가 갑자기 말썽이어서 길을 잃은 거야. 발에 불이 나도록 걸어도 타워는 지도 속에서 멀어질 뿐이었어. 셀카봉에 끼워둔 스마트폰을 요리조리 돌려보고 지도 안에 적힌 일본어를 읽으면서 찾으려고 해도 인연이 아닌지 도저히 찾지 못했지. 아, 나 길치는 아니야. 정말이야!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가이드 역할을 맡은 내가 뜨거운 눈총을 몇 번이나 받았을 텐데 혼자 여행하니 이것도 일탈이 되더라고. 좀 헤매면 어때. 좀 실패하면 어때. 또다시 새로운 곳을 마주할 수 있잖아. 혼자 여행하니까 누릴 수 있는 호사일지도 몰라. 여행만큼 실패도 달콤한 게 있을까?
해가 지고 짙은 갈색 어둠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할 때였어. 내가 생각한 곳까지만 가보고 그래도 가부키초 타워를 못 찾으면 다시 시부야로 넘어가자고 다짐했는데, 마침 직장인 퇴근 시간인 여섯 시인 바람에 고층 빌딩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진풍경이 벌어졌어. 조금 전까지 거의 나 홀로 걷던 거리가 5분도 안 되어서 직장인들로 북적였지.
그들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걸었어. 직장인들이 퇴근 후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곳이 어딜까? 바로 퇴근하기 위해 가는 전철역이야!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 마지막 화에서 창희가 사람들에게 떠밀려 어딘가로 들어가듯이 나도 일본 직장인 속에 섞여 떠밀리면서 ‘기왕 이리됐으니 전철을 타고 시부야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어.
며칠 전 전철 안에서도 실감했지만 일본의 분위기는 무채색에 가깝게 느껴질 때가 있어. 한국의 직장인 사이에 섞여서 걸었다면 이렇게나 고요하고 단색적인 분위기는 느끼지 않았을 거야. 엄청난 수의 직장인들이 앞만 보고 걸어가는데 전혀 시끄럽지 않고 정적까지 느껴질 정도였어. 정류장에 멈추는 버스조차 거슬리는 소음을 내지 않았어. 한국보다 튀지 않고 일률적인 일본의 분위기는 좋기도 하고 단점으로 느껴지기도 해. 물론 일본에도 한국과는 조금 또는 사뭇 다른 화려하고 튀는 문화가 있지만, 난 신기하게도 일본 특유의 무채색에서 일본과 한국의 다른 점을 더욱더 강하게 느꼈어.
비슷한 양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 머리를 한 직장인, 반대로 편한 사복을 입은 직장인 모두 조용히 앞만 보고 걷는데, 하늘이 무심하게도 갑자기 비까지 내려서 나를 포함한 사람들 대부분은 조용히 우산을 펼쳤어. 시부야 혹은 다른 곳으로 향하는 회색빛으로 물든 듯한 사람들. 하지만 이러다가도 시부야 번화가로 나가면 네온사인과 고막을 파고드는 큰 광고 소리, 활기찬 음악이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내겠지. 회색빛과 화려한 유채색의 분위기. 얼핏 보면 분위기가 모순되는데 한 지역에 공존하고 있어. 시부야와 신주쿠처럼 모두가 아는 지역은 일본의 다양한 얼굴을 뚜렷하게 품고 있는 것 같아.
아, 뜬금없지만 네가 일본에 진출해서 경기를 뛸 때만은 바다 위를 누비는 유채색으로 가득 찬 선수 그 자체였어!
밤의 시부야.
내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어 줄래? 난 어릴 적 ‘김연경’이라는 평범한 내 이름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어. 한국에서 제일 많은 성인 김 씨에 어딘가 물렁물렁해 보이는 ‘이응(ㅇ)’이 들어간 연경이라는 이름. 오죽하면 강해 보이고 싶은 마음에 초등학생 때 ‘강**’라는 이름을 마음속으로 지었어(이름 전체는 부끄러워서 말을 못 하겠어...).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그 이름으로 살았는데, 어느 날 나도 모르게 혼자 놀다가 집 베란다 벽에 ‘강**’라는 이름을 써버렸어. 왜 썼는지는 기억이 안 나. 이름 외에 몇 글자를 더 쓴 것 같은데 그것도 기억이 안 나. 지금 기억나는 건 벽의 글자를 확인하고 걱정과 화가 서린 얼굴로 이게 무슨 뜻이냐고 다그치던 어린 시절 나의 전부였던 부모님의 모습뿐이야.
생일인 2월 26일도 어찌나 평범하게 느껴지던지! 초등학교 때는 생일 순으로 신발장에 실내화를 넣는데 2월이 생일인 나는 항상 가장 마지막 자리였어. 어린 마음에 뒷자리가 아니라 앞자리에 있고 싶었는데… 빠른 연생이라서 학교에서는 또래보다 나이가 한 살 적었고, 사회에서는 나이가 같은데 누군가 언니가 되고 누군가 동갑이 되는 모호한 사람이 됐지. 나에게 이름과 생일은 무채색처럼 그다지 다채롭게 느껴지지 않았어. 사회에 나와서는 ‘김연경’이라는 이름보다 세례명인 ‘카타리나’라는 영어 이름을 더 많이 썼어. 마침 회사에서도 닉네임을 부르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어서 영어 이름으로 불렀거든. 회사,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새로 알게 된 친구, 거래하던 해외 업체… 많은 곳에서 ‘연경’이라는 이름은 발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영어 이름을 사용해 달라고 했지. 사실은 발음이 어려워서 그런 게 아니라 내 이름이 탐탁지 않아서 숨긴 거야. 난 진짜 이름을, 내 정체성을 감추면서 사랑받고 싶어 하는 모순된 존재로 살았어.
그런데 무채색이던 내 삶에 붓으로 산뜻한 색을 콕 찍어서 번져 나가는 듯한 사건이 일어났어! 내가 널 좋아하게 된 거야. 처음에는 무심한 점 하나였는데 점점 크게 번져 나가서 너와 같은 이름과 생일을 지닌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하기 시작했어. 원래 좋아하면 모래알만큼 비슷한 부분만 발견해도 운명이라면서 설레하잖아. 같은 여자에, 삼십 대에, 집에서 막내에… 비슷한 점을 억지로 가져다 붙이면 끝도 없겠지만. 그래도 이름과 생일까지 똑같은 건 꽤 신기하지 않아?
업무 동료, 친구, 줌 회의, 블로그, 브런치, 인스타그램… 어느새 많은 곳에서 내 진짜 이름 석 자 ‘김연경’을 사용하는 나를 발견했어. 어째서인지 그제야 모순된 알을 깨고 진짜 내가 세상에 나온 기분이 들었어.”
2.보잘것없는 모습에서
“긴자선 시부야역의 출구를 빠져나오면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라는 큰 상업 시설이 있어. 옷부터 식당까지 많아서 대형 상업 시설의 정석을 보여주는 건물이었는데, 9월의 더운 날에도 여전히 사람이 많은 이곳에서 친구인 유카 언니를 만났어.
날달걀에 달콤한 양념이 배어든 고기를 콕 찍어서 먹는 스키야키가 먹고 싶어서 함께 시부야스크램블 스퀘어의 맛집을 찾아갔어. 유카 언니는 예전에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 뛰었고, 지금은 꿈나무들을 가르치며 관리하는 일을 해서 스포츠 자체에 관심이 많아. 나의 배구 이야기도 잘 이해하고 들어주는 언니야. 하하.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 샤브샤브츠카다.
이날도 맥주 한잔을 곁들여 스키야키를 먹다 보니 당연한 듯 스포츠 얘기가 나왔어. 내가 웃으면서 고래 너에 대해 말하는 모습을 보더니 유카 언니가 묻더라. 언제부터 고래 널 좋아하게 됐냐고 말이야.
그러게. 고래 너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을까? 혼자 곰곰이 생각해 봤어. 그리고 나름대로 답을 얻었어.
한 번 설명해 볼게.
처음에 고래 너의 경기를 봤을 때 다른 선수들을 다독이고, 답답해하기도 하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렇게나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어. 이후 올림픽과 중국, 한국에서 펼친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듯한 활약에도 팬으로서 존경하는 마음이 드는 정도였지. 이전에 존경한 대상들에게 그랬듯 시간이 흐르거나, 바빠지거나, 다른 존경할 만한 사람이 생기면 멋대로 잊어버리고 떠날 정도였달까. 그런데 이토록 내 삼십 대를 크게 차지하는 존경을 품은 사랑으로 발전한 이유는 뭘까?
어릴 적부터 어느샌가 알고 있던 시부야처럼
어느샌가 내 머릿속에 고래가 자리 잡은 이유가 뭘까.
답을 찾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되짚다가 너의 자서전을 읽던 날에서 멈췄어. 팬인데 이제야 자서전을 읽는다며 부랴부랴 읽기 시작한 날이었지. 네가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지만 해외 진출의 성공적인 사례가 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적응하려고 힘쓰던 모습이 나왔고, 이후 터키에 진출했을 때는 낯선 언어와 다른 선수들의 텃세에 고생하던 네 모습이 나왔어.
매일 한국에 돌아오고 싶던 너였지만 이겨내려고 분투하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봇물처럼 터졌어. 여자 혼자 어린 나이에 해외에서 적응하기 얼마나 힘들었을까. 물론 이러한 이야기를 예능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에서도 본 적이 있지만, 책의 활자로 눈에 담았을 때 훨씬 와닿았어.
네가 힘들어한 모습에 눈물샘이 터진 걸 보니 너를 존경한다고, 잘 아는 팬이라고 자부하던 나조차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고, 경기하다가 화가 나면 화끈하게 욕도 하고, 활기차게 인생을 보내는 모습에 너는 항상 강하고, 쉽게 상처받지 않는다고 은연중에 생각했나 봐. 그리고 항상 밝고 선명한 유채색의 삶만 살았다고 생각한 너에게서 힘들고, 외롭고, 어찌 보면 보잘것없는 무채색이 느껴졌을 때 진정으로 너를 사랑하게 됐어.
조금 웃기지 않아? 너를 대표하는 수많은 번쩍번쩍하고 화려한 수식어도 좋지만, 정반대인 약한 부분을 알아챘을 때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다니 말이야. 시부야가 화려한 유채색과 같은 번화가와 직장인들이 뿜어내던 무채색을 모두 지닌 것처럼, 너 또한 유채색과 무채색의 매력을 모두 지닌 시부야와 같은 여자구나.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에 당연한 듯 알게 된 시부야처럼, 너 또한 나도 모르는 새에 머릿속에 소중한 존재로 자리 잡았구나.
지금도 대중들은 너의 강하고 쿨하며 승부욕이 강한 모습을 떠올릴 때가 많아. 하지만 나를 비롯한 팬에게만큼은 네가 힘들 때 약한 모습도 보여주고 기대지 않을래? 우리는 어떠한 모습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
“경기 보고 내가 살아갈 힘과 나아갈 용기를 얻었어. 고마워.”
“7년 사귄 남자 친구랑 헤어지고 집에 오는 차 안에서 울고 신발장에서 울었어. 헤어지고 나니까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한 시간이었더라. 네 경기도 매번 볼 수 있는 것에 행복해하면서 너의 행운을 빌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목표한 대로 나아가. 따라갈 준비는 언제나 되어 있어.”
수많은 편지의 내용을 눈에 담으며 드디어 부산의 내 집에 도착했다. 익숙하게 도어록을 열고 들어오자 멀리 베란다 창문에 붙어 있는 고래의 브로마이드가 보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거실 한 편에는 고래의 광고 사진, 깔끔하게 정리된 고래의 자서전, 분홍색과 보라색으로 꾸며진 배구공 등이 진열된 곳도 있었다. 엄마가 본다면 결혼은 안 하고 아이돌을 좋아하는 십 대 소녀처럼 꾸며놨다고 등짝을 한 대 맞을 수도 있지만, 정작 나 자신은 이 공간에서 누구보다 아늑한 행복을 느꼈을 거다.
답정너 고래의 ‘왜 사는 겁니까?’라는 난해하기 그지없는 질문. 아쉽게도 해답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적어도 뿌리 깊은 나무처럼 내 마음에 셀 수 없이 많은 뿌리를 내리고 따뜻하게 감싸주어, 쉬이 마음이 깨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존경과 사랑의 존재가 있음은 확실하다. 존경과 사랑의 존재가 나를 숨 쉬게 하고, 늘어진 몸을 일으켜 한 걸음 더 내디딜 수 있게 해주는 것 또한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