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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경 Jun 23. 2024

눈물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 나리타 익스프레스

<번외편> 30대 INFJ와 ESTP 커플, 일본 도쿄에 가다 (3)

<번외편> 30대 INFJ와 ESTP 커플, 일본 도쿄에 가다 (3)

30대 ESTP(남)/INFJ(여)의 일본 여행기입니다.

※ MBTI는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MBTI를 쓴 것은 여러분의 관심을 끌기 위함일 뿐,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비 오는 신주쿠역.

며칠 전 올해부터 다니던 미술학원을 그만두었다. 7월부터 일본 통역 출장 등으로 매우 바쁠 게 뻔해서 매주 가던 미술학원을 자주 못 갈 듯하여 쉬기로 한 것이다.


매주, 바쁘면 2주 만에 한 번씩 보던 선생님과 성인반의 미술 친구들. '친구들'이라 칭하기에는 연배가 뒤죽박죽이었지만, 미술이라는 우리에게서 답 없는 현실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마술 같은 예술 앞에선 친구라는 표현이 왠지 어울렸다.


그만두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 엄마의 인물화를 그리는데 마무리 짓기가 참 어려웠다. 고작 그림 한 장인데 완성한 후 더는 그림을 그릴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지막을 맞이하기가 괜스레 슬프고 불안해진 것이었다. 공허하다는 단어가 이럴 때 가장 적당하려나? 마지막을 코앞에 두고 혼자 눈시울을 붉히고 나서야 미술학원을 향한 애정이 생각보다 컸음을 깨달았다.


공허한 와중에도 불쑥불쑥 곱슬머리의 그(남자친구)가 생각이 났다. 이제 겨우 150일을 넘긴 우리지만, 내가 공허한 마음을 이야기했을 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나의 공허함을 이해하지 못할 테다. 정확하게는 나를 사랑하니까 정말 이해하고 싶은데, 도대체 왜 슬퍼하고 마음이 텅 비었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갈 것이다. 내가 마음이 공허하다고 하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곱슬머리의 그(ESTP): 그럼 (미술학원에) 다시 가! (이렇게 말하고 문제를 해결해 줬다고 뿌듯해할지도 모른다)

나(INFJ): ... (바보, 멍청이, 해삼, 말미잘아... 마음이 텅 빈 걸 일단 위로해 달라고...)


평소 슬픈 일이 생겼을 때 나는 울적한 음악을 들으며 나만의 세계에 빠져들고, 그는 웃긴 짤을 찾아보며 잊으려고 한다. 우울증과 자살이 이야기 주제로 떠오르면 나는 과몰입해서 과하게 힘들어하고 그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말한다. 나는 자신과 타인의 공허함에 감정 이입하고 그는 울적함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울함, 슬픔, 공감이라는 단어와 참 안 어울린다.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면 슬픈 일이 오히려 많은 쪽에 속하는데, 인생에 도움이 안 되니까 그냥 기억에서 지워버린 느낌이다. 내가 관찰한 곱슬머리 그의 언행 중에서 단연 충격을 넘어 신선함을 느낀 것은 고민 상담을 했을 때였다.


나(INFJ): 나는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성격이라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 앞으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잘하도록 노력해야겠어...

곱슬머리의 그(ESTP): ?????


곱슬머리의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한다'라는 말부터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고 한다.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게 애초에 불가능한데 왜 저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 웃긴 얘기, 돈 얘기처럼 눈에 보이는 사실이 아닌 추상적인 감정 이야기를 하면 끙끙대던 그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곱슬머리의 그(ESTP): 끙... 얘기가 어려워요... 그래도 끝까지 들었어요...

엄마의 인물화.


도쿄 여행할 때도 그는 화가 나면 이성적으로 사실을 하나하나 짚었고 나는 감정적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조금만 더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도쿄 나리타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도쿄에서 내로라하는 핫 플레이스인 신주쿠로 가기 위해 '나리타 익스프레스'라는 특급 열차를 타기로 했다.


나리타 익스프레스는 왕복 13,000엔으로 상당히 비싼 열차다. 높은 가격만큼 만족스러웠으면 좋겠거늘 우리는 발권기 앞에서부터 버벅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여권을 제시하면 할인받을 수 있는데 우리는 몰라서 비싸게 결제했다. 평소라면 도쿄에 오기 전부터 자세히 조사를 해왔을 텐데, 그와 함께하는 여행이라서 마음을 놓고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뭐'라고 생각하며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자신을 탓했다.


두 번째. 왕복표를 끊었는데 총 4장(왕복이니까 2장 X 2명이니까 2장=총 4장)이 아니라 총 8장이 나왔다.

세 번째. 당황해서 일본 직원에게 물었는데 하필이면 도쿄 여행 중 손에 꼽을 정도로 불친절하고 반말까지 하는 여직원이었고, 그녀의 잘못된 설명을 들은 후 우리는 나리타 익스프레스 표가 있음에도 사용하지 않고 스이카 카드(일본 교통 카드)를 개찰구에서 찍고 들어가 버렸다.

네 번째. 마침내 우리는 깨달았다. 나리타 익스프레스는 특이하게 개찰구를 지나갈 때 사용하는 표 1장, 열차 탑승 좌석이 기재된 표 1장, 즉 총 2장이 기본적으로 발권된다는 사실을.


즉 우리는 왕복 나리타 익스프레스 표를 샀으므로

2(개찰구에 쓰는 표 1장, 탑승 좌석이 기재된 표 1장) X 2(왕복이니까) X2(인원수가 2명이니까) = 8장이 나온 것이다.


아니, 왜 글로 쓰는데도 어렵게 느껴지는 것인가... 어쨌든 이를 뒤늦게 깨달은 우리. 이미 손에는 표 8장을 쥐고 있음에도 스이카 카드(교통 카드)를 개찰구에서 추가로 찍고 열차 승강장으로 들어와 버렸다. 이러한 경우 신주쿠에 도착하면 13,000엔이나 주고 산 표는 무용지물이 되고 역에서 나가려면 스이카 카드를 찍고 나가야 하기에 카드의 돈을 더 쓰게 된다.


스이카 카드를 찍으면 추가로 돈이 나가기에 신주쿠역에 꼼짝도 못 하고 갇혀버린 우리. 시계는 21시를 향해 달렸고 밖에는 비가 내렸으며 각자의 손끝에는 무거운 캐리어가 있었다.




21시를 넘어가자 나는 조급해졌다. 신주쿠역을 나가서 내일 방문할 디즈니 시 버스표를 구매하고 맛있는 잇푸도 라멘을 먹는 것이 오늘 계획이었는데 라멘 가게 영업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호텔에 체크인도 해야 했다. 마음이 급해져서 해야 할 일이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처럼 머릿속에 끝도 없이 떠올랐고 나는 망치로 얻어맞은 두더지처럼 정신을 못 차렸다.


곱슬머리의 그가 신주쿠 개찰구 옆에 서 있는 무뚝뚝한 남자 역무원에게 일본어로 더듬더듬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언뜻 보니 남자 역무원은 외국인인 우리에게 불친절해 보였고 살갑게 도와주지 않을 듯 보였다. 조급한 감정에 매몰된 나는 자신도 모르게 말하고 있던 그의 손을 붙잡고 나와서 일단 디즈니 시 버스표부터 사러 가자고 말했다.


나(INFJ): 일단 디즈니 시 버스표부터 사러 가자.

곱슬머리의 그(ESTP): ??? 뭐라는 거야. 내가 얘기하고 있는데 왜 나온 거야?


이미 정신이 없던 나는 하루에 세운 계획이라도 완료하려 했고, 나리타 익스프레스 값 13,000엔과 추가로 스이카 요금까지 내게 된 그는 자신의 말을 막은 나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평소보다 더 굵은 목소리로 그는 내게 하나의 더듬거림과 막힘없이 말을 쏟아냈다.


곱슬머리의 그(ESTP): 아니, 이해가 안 되네? 내가 아까 신주쿠역에서 남자 역무원한테 얘기하고 있었잖아. 한창 말하고 있는데 왜 데리고 나온 건데? 디즈니 시 버스표는 나중에 발권해도 되잖아. 왜 서둘러서 가려는 건데?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네가 지금 조급하게 움직이고 있잖아!

나(INFJ): 아니... 라멘도 먹으러 가야 하고... 오늘 계획이...

곱슬머리의 그(ESTP): 라멘은 굳이 안 먹어도 된다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대충 이러한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아까 그가 역무원과 대화할 때, 더듬거리며 일본어로 얘기하는 그와 무정하게 쳐다보는 역무원을 보니 일이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곱슬머리의 그가 영 미덥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이끌고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미덥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기에는 미안했다.


반대로 곱슬머리의 그의 말에도 틀린 구석이 전혀 없었다. 금방 그가 한 말을 찬찬히 뜯어보아도, 그는 아무 말, 감정 섞인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감정에 치우쳐서 '나를 무시했어!'라든지 '기분이 나빠'와 같은 감정이 담긴 문장을 구사하지 않는다. 분노의 끝에 도달해 사리 분별을 못 하고 화내는 사람이 아니어서 화를 낸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평소 감정적으로 화내는 사람을 자주 마주했던지라 그런 그가 신기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으면 그야말로 말로 두들겨 맞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욕을 하거나, 감정적이거나, 저렴하게 말하지 않는 데도 팩트 폭력을 당하니 나는 어느새 비 오는 신주쿠역에서 울고 있었다... 극 T의 팩트 폭력은 당해본 자만이 안다...


내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닦자 그의 손과 동공이 떨렸고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기 시작했다.


이날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4일간 함께하며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울었다.

첫째 날: 나리타 익스프레스 표로 그와 의견 차이가 있어서

둘째 날: 디즈니 시 버스를 타야 하는데 놓쳤고, 길을 헤매는 그의 모습과 상황이 그저 다 슬퍼서

셋째 날: 시부야 스카이에서 사진을 서툴게 찍는 나에게 "넌 양심이 없냐!"라고 말하는 그가 미워서

넷째 날: 캐리어를 끌고 몇 시간 이동한 그에게 괜히 미안해서


누군가는 자잘한 일로 눈물을 흘리는 징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른 지금이라면 나도 그에게 맞서 싸웠을 것 같다. 난 평소에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도 거의 흘리지 않는다. 그러나 저 때는 당황하고 슬프면 희한하게도 눈물이 제 발로 나와 얼굴을 타고 흘렀다.


아마 그와 만나기 전 혼자 여행할 때는 모든 일을 직접 해결해야 했지만, 지금은 곱슬머리의 그라는 안심할 수 있는 대상이 한 명 더 있으니 마음이 편해져서 그만 눈물이 흐른 듯하다. 아니면 혼자 여행을 다닐 때보다 우여곡절이 많아서 속상함에 눈물이 튀어나왔을 수도, 그냥 그가 짜증 나서 울었을 수도 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눈물의 이유를 흘린 자신도 모를 때가 있지 않은가.


어쨌든 눈물은 눈물이고 해결할 일은 마무리해야 했다. 곱슬머리의 그는 내 눈물에 잠시 당황했지만 나 때문에 해결할 방법이 없어졌다며 낙담했고, 나는 왜 해결이 안 되냐면서 혼자 신주쿠역의 역무원이 있는 곳으로 다시 향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번외편> 30대 INFJ와 ESTP 커플, 일본 도쿄에 가다

1.도쿄 비행깃값 120만 원의 정체 - 대한항공

2.호텔 이중 결제의 정체 - 발리안 리조트

3.4일, 눈물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 도쿄 나리타 익스프레스

4.목표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 - 비 오는 신주쿠역

5.그의 추억과 술 취한 일본인 - 이케부쿠로 토리키조쿠

6.드러난 INFJ의 이중인격 - 도쿄 디즈니 씨(1)

7.드러난 INFJ의 이중인격 - 도쿄 디즈니 씨(2)

8.일본 슈크림 같은 남자와 도쿄에 - 이케부쿠로

9.일본 벚꽃처럼 진한 우리 - 신주쿠교엔

10.크리드 카미나 오 드 퍼퓸 - 신주쿠 루미네 백화점

11.이 남자와 사귀려면 도쿄로 가라 - 신주쿠 스시잔마이

12.깨진 휴대폰 액정과 함께 깨진 이성 - 규카츠 이로하, 블루보틀

13.우리 좀 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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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번역가: https://linktr.ee/linakim_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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