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연경 Sep 22. 2024

회피형 인간에게 새 사람이란

30대 INFJ와 ESTP의 연애

30대 INFJ(여, 글쓴이)와 ESTP(남) 커플 이야기

※ MBTI는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MBTI를 쓴 것은 여러분의 관심을 끌기 위함일 뿐,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어느 날 러닝 머신을 뛰다가 유튜브 뮤직의 알고리즘으로 한 노래를 알게 되었습니다. 2020년에 발매된 송민호의 <도망가>라는 노래인데요. 최신 음악도 아니고 가사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도망가!"라며 처절하게 외치는 송민호의 목소리를 듣자 머릿속은 러닝 머신이 아닌 거친 광야를 달리며 도망치는 제 모습을 멋대로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평범한 하루를 보냈음에도 <도망가>를 들으며 상상하고 카타르시스를 느꼈을까요?



왜 사람들은 이동할까? (중략) 왜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고 힘겨운 이국의 정글로 들어갈까? 어디서나 대답은 하나겠지.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소망하며 이주한다.

-책 <파이 이야기>



책 <파이 이야기>에서 나왔듯이 현재의 삶이 나쁘지 않음에도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소망하며 익숙하지 않은 새 길에 한 발을 내딛습니다. 저 또한 더 나은 꿈을 품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 엮이는 두 가지 일에 발을 들였습니다. 첫 번째는 곱슬머리 그(남자친구, ESTP)와의 결혼 준비, 두 번째는 모임 두 곳(독서 모임, 30대 여자 모임)에 가입한 일입니다.


사실 책 <파이 이야기>를 다 읽은 그날, 저녁에 곱슬머리 그와 신통치 않은 전화를 하고 잔뜩 우울해져 있었습니다. 자세히 글로 쓰기는 어렵지만, 직설적이던 그의 말이 제 머릿속을 쿡쿡 찌르며 괴롭혔습니다. 삼십 도를 우습게 웃돌던 여름 날씨가 드디어 가라앉으려는지 밖에서는 비가 한바탕 내리고 있었습니다. 시원한 비는 대형 땅 꺼짐(싱크홀)을 만들고 부산 한 곳을 물에 잠기게 할 정도로 무시무시했지만, 드디어 무더위가 가시겠다는 해방감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토록 서늘하고 강력한 비조차 울적한 제 기분을 날려주지는 못했네요.


곱슬머리 그와의 달갑지 않은 전화뿐만 아니라 얼마 전 참여한 독서 모임도 가기 전에는 은근히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두 번 이상의 만남을 힘들어하곤 했는데요. 과거에 저의 솔직한 모습, 즉 인간 골든레트리버처럼 사람들을 사랑하고 믿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가 이용당했던 적이 있는지라, 제 본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 지레 겁먹고 눈치 보다가 도망가기 일쑤였죠. 제 도망의 역사는 참 길고 지리멸렬했습니다. 도망가며 혼자를 자처하던 제가 곱슬머리 그(남자친구, ESTP)를 만난 후 조금 더 친화력 있는 성격으로 거듭나고자 모임에 가입한 것도 불과 몇 주 전입니다.

 

몇 주 전 좋은 기회로 알게 된 상담사가 누군가와 가까워지기 어렵다는 저에게 말해주더군요. "겹겹이 쌓은 성(마음의 벽)을 낫으로 깨부수고 누군가에게 꾸며진 모습이 아닌 진정한 자신을 보여줬을 때, 이것이 상대방에게 수용되었을 때 인간관계를 향한 무서움이 사라지고 고쳐진다"고요. 인간관계에서 작은 일을 해낼 때마다 자신을 칭찬하는 습관을 들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다행히 이후 독서 모임을 무사히 끝냈고, 저는 상담사가 말한 대로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잘 다녀온 자신을 나비 포옹, 두 손으로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칭찬했습니다. 물론 곱슬머리 그는 상담사가 해준 얘기를 듣고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고"라며 일축했지만요. 자기만의 방식으로 위로하고 싶었는지 "왜 그 문제로 힘들어하고 고민해? 난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어"라고도 하더군요. 저의 모임 생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널 보내도 되겠냐며 걱정하면서도 짓궂게 말하는 곱슬머리 그는 참 신기한 녀석입니다...


곱슬머리 그와 함께하기 프로젝트는 아직 갈 길이 요원하게 느껴집니다. 이제 서로의 부모님을 뵙기로 한 단계인데, 아직 그 누구도 저에게 무어라 하지 않았음에도 연애와 달리 결혼은 여러 사람이 개입하게 되는 인간관계의 응축판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느끼며 걱정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일을 자주 예측하는 저의 성격답게,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최대한 준비하고 셀프로 부지런히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자식 문제에서만 유독 소설가가 되는 엄마가 상상력을 발휘한 이야기로 곱슬머리 그에게 부담을 주면 어떡하지, 곱슬머리 그의 부모님은 어떤 사람일까, 너무 T(MBTI)스러우면 어떡하지, 나를 너무 손에서 쉽게 놓을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면 어떡하지, 보통 부모님과의 첫 만남에서 찜찜한 느낌이 들면 조상신이 도운 것이니 얼른 도망가라는 말이 있는데 곱슬머리 그와 내가 비슷한 감정을 느끼진 않겠지, 내가 너무 생각이 많은 건지, 왜 나는 담대하게 생각하지 못하는지, 내가 더 관대해져야 하는지 등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결국 자기 검열까지 하는 제가 어이없었습니다. 앞으로도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느라 가장 중요한 곱슬머리와 나는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때때로 느끼겠지요.


곱슬머리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간 눈동자만 보아도 마음이 조약돌처럼 동그랗고 보드랍게 되는데, 여기에 결혼이라는 주제가 난입하면 하나하나 거슬리고 못마땅할 때가 있습니다. 곱슬머리 그의 직설적이기 그지없는 매력에 끌렸지만 이제는 무례한 언행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고민 끝에 지적하고 사과를 받곤 합니다. 상대에게 찜찜한 부분이 있는데 결혼하고 몇 배로 그 부분 때문에 불편하면 어떡하나, 내가 손해 보면 어떡하나, 이러한 생각을 본능적으로 하다가도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처럼 정반대로 내가 좀 손해 보면 어때, 이렇게 행동하는 나에게 곱슬머리 그는 애정이 떨어지지 않을까, 나를 떠나면 어떡하나, 내가 너무 예민하나, 내가 그에게 바라듯이 나도 있는 그대로 그를 사랑해야 하는데! 우리가 언제나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러면서 후회하곤 합니다. 머릿속에서 형체 없는 생각들이 싸우고 화해하고 북 치고 장구 치고 아주 난리입니다.


생각의 꼬리 끝에는 결국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슬쩍 쳐듭니다. 노래 <도망가>를 들으며 상상했듯이 그저 혼자 치달려서 어딘가에 도착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한시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저는 이제 알아요. 제가 혼자 있는다고 완벽하게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누군가와 함께한다고 완전해지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든 불편한 이 세상에 제가 굳이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 세상을 떠날 용기는 없다만요.


혼자 산 지 어언 3년이 다 되어가는 삼십 대 여성이 이렇듯 눅눅하고 영양가 없는 고민에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된다는 생각은 듭니다. 혼자서도 몇 년 지내보았으니 이제 누군가와 함께하는 길도 뚝심 있게 끊임없이 고민하며 완주해 보고 싶군요. 책 <모순>의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라는 문구처럼 일단 인생을 살아가면서 곱슬머리 그와 서로를 탐구해보고 싶습니다. 함께하는 길에 궁극적인 축복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너무 상처 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는 내리고 그저 도망치고 싶던 밤. 아침이 되자 에어컨이 있어야 겨우 일하던 며칠 전 환경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원해졌습니다. 드디어 여름의 마침표가 찍혔습니다. 아침에 "더운여름보낸다고모두고생했다"라는 띄어쓰기 없는, 그렇기에 더욱 엄마 색깔이 묻어나는 간결한 문장이 메시지로 와 있었습니다. 제가 새롭게 내디딘 길의 끝에서도 모두 고생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0대 연애 #30대 #도쿄 #번역 #MBTI #INFJ여자 #ESTP남자 #이해 #싸움 #예비시부모 #이해가안될때 #연애에세이 #연애이야기 #INFJ #ESTP #새사람

김연경 번역가: https://linktr.ee/linakim_8000


이전 14화 내향인의 남자친구 모임 참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