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갈치조림
입사동기인 그녀는 나만큼 키가 컸다. 낯가림이 심했던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 준 것도 같이 프로젝트를 하자고 먼저 제안을 한 것도 그녀였다. 큰 키만큼 가늘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매일 아침 나에게 와 커피 우유를 건네며 씩씩하게 웃었다. 그녀는 내 마음에 분명한 흔적을 남기며 나와 단짝이 되었다. 신입사원다운 치기로 얼룩진 일을 향한 무모한 도전도, 경쟁이 치열했던 숨 막히는 시간 속을 허우적대며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던 오만한 자존심도, 우린 똑같이 닮아있었다.
입사 4년 차, 우리는 나란히 대리로 승진을 했고, 그해 겨울 과감히 사표를 내고 그녀는 영국으로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다시 돌아와 각자의 자리에서 최고가 되자고 굳게 다짐을 했고 유학시절 내내 수많은 편지를 쓰며 서로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이년 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든 회사의 대표가 되었고, 나는 한층 좋은 조건을 제시한 대기업 계열사인 광고회사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다. 또다시 두 해가 지난 어느 가을날, 그녀는 돌연 결혼을 선언했다. 회사와 일은 잠시 잊고 남편을 따라 해외로 떠나기로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 순간에 나는 서운한 마음이 울컥하고 밀려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머쓱해하는 그녀에게 건네며 그녀를 떠날 보낼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동안 수차례 눈물 콧물을 자아냈던 둘만의 이별 의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출국을 코앞에 두고 집밥을 꼭 해주고 싶다며 나를 그녀의 짧았던 신혼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녀가 좋아하는 와인 한 병을 사 들고 그녀의 집 벨을 눌렀다. 연두 빛 앞치마를 두르고 누가 봐도 아직 신혼의 설렘이 폴폴 나는 수줍은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매콤하고 짭조름한 갈치조림 냄새가 났다. 그녀가 부산 토박 인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갈치조림을 했음이 분명했다. 나는 순간 말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또 밀려들었다. 당분간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한층 더 실감 나면서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난 듯 허전해졌고, 외출하는 엄마의 손을 끄는 어린아이 같이 심술이 났고, 그러다가 주책스럽게 눈물까지 슬쩍 돌았다. 그녀와 보낸 내 청춘의 소중한 시간들을 내 곁을 떠나는 그녀와 함께 송두리째 도둑맞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말없이 내가 사 온 와인을 따르며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애써 꼭 쥐고 있던 울컥 대는 마음을 놓으며 어느새 붉어진 그녀의 두 눈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그저 잠깐이면 된다고. 곧 다시 돌아올 거라고…’
그녀가 떠나고 나는 정신없이 바쁜 한 해를 보냈다. 그다음 해, 그녀는 남편을 홀로 남겨두고 다시 돌아와 일을 시작했고, 지금 내 앞에서 신입시절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새롭게 맡은 일 이야기에 열을 올리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나만큼이나 아쉬운 마음으로 뜨거운 안녕을 고했던 단짝 친구의 갈치조림 – 이렇게 금방 다시 만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