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인연
불가 용어에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인연은 오고 가는 시절이 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야 할 인연은 만나게 되어있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만나지 못한다고 했다. 그저 또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오랜 지인이 있었다. 나와 사는 방식도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고 또 달랐지만 난 그녀의 씩씩한 미소와 올곳한 성실함이 좋았다. 그런 그녀와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같이 웃고 울고 망가지고 방황하기를 수차례...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긴 인연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함께 떠난 여행이다. 서로가 너무 편한 탓인지 서로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하고 의지한 탓인지 늘 서운함을 남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꾹 참았을 짜증과 투정을 순간 뱉어내고 만다. 그리고 후회한다. 그러다 생각해보면 나만 그런 것도 아닌데 왜 나만 이렇게 미안해야 하는가 하는 얄궂은 심술이 생긴다. 그러다 또 미안해한다. 어렵게 떠난 여행에서 서로에게 실망과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리고 몇 달이 흘렀다. 문뜩문뜩 그녀와 보냈던 시간을 생각하면 그녀가 나에게 보내준 살가운 행동과 따뜻한 말한 마디를 생각하면 그녀와의 인연을 이렇게 접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내일 지구가 끝나는 것처럼 그 사람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전달해보라. 그 사람이 당신에게 소중하다면... ' 몇 번에 문자를 보내고 카톡도 보내고 짧은 그녀의 답을 얻어내고 그러다 또 연락은 얇은 실처럼 뚝하고 끊어지고 만다. 오랜만에 햇살 아래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며 난 그녀와 함께 보낸 수많은 계절과 그리고 그 산책길을 떠올렸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그녀와 나의 인연이 여기 까지라면 그녀가 나를 보는 것이 마음의 상처라면 놓아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억지로 인연을 이어가려는 나의 욕심이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뜩 스치고 지나간다. 시절 인연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욕심낼수록 미련을 가질수록 그 인연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 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영원히 내 품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인연도 그런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래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좋은 기억만 남기고 보내주기로 했다. 언젠가 우연히 만나게 되면 그저 처음 만나는 인연처럼 다시 환하게 웃을 수 있도록 마음속에서 서서히 그녀를 놓아주리라... 그러고 보니 곧 그녀와 나의 생일이다. 주민등록상에 생일 같은 것도 우리에겐 그저 놀라운 축복이며 감동이었던 지난날이었다. 그녀를 위해 노란 장미 한 송이를 산다, 그녀에게 전해줄 수 없지만 장미 앞에 환하게 미소 짓던 그녀를 떠올린다. 그래.. 인연이라면 우리 꼭 다시 만나겠지?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