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정원

by anego emi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인 나는 고3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한문을 포기했다. 고작 다섯 문제의 정답을 찾아내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고, 대충 찍어서 하나라도 맞추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영어가 난무하는 광고 용어들을 익숙하게 쓰며 살아온 덕에 한문이라는 녀석은, 어쩌다 펼친 신문 속에서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렇게 한문에 무지한 내가, 겁도 없이 한문을 기초로 하는 일본어를 배우겠다고 다 늦게 덤빈 것이다.


처음에는 나도 3개 국어(한국어, 영어, 일어)에 한번 도전해 보겠다는 알량한 생각이 시작이었다. 그러다가 재미를 붙이고 본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발견되는 한국어와 유사한 단어와 발음에서,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일본어를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생겼다. 퇴사를 결심하고 강남역 근처의 일본어 학원을 두 달 동안 다니면서 기본 알파벳을 익히고 간단한 회화를 배웠다.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으며 재미있었다. 나는 일본어쯤은 문제없다는 자신감을 쌓아가며, 유학원에서 소개해준 도쿄의 어학원으로 등록금을 보내고 유학 준비를 했다.


일본어는 우리가 학창 시절 내내 용을 쓰고 배웠던 영어보다 쉬웠다. 문법도 말하기도 듣기도 같은 아시아 문화권인 우리에게는 영어보다 배우기 유리했다. 유럽인들이 우리보다 영어를 더 쉽고 빨리 배우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가장 힘이 들었던 것은, 쓰는 법과 읽는 법이 다르다는 점과 일본식으로 바꾼 이상한 영어들을 그들처럼 쓰고 발음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를‘막그도나르도’라 읽고 써야 한다. 처음에는 비싼 돈을 내고 미국 어학연수 기간 내내 교정받은 ‘본토 발음’을 무시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짜증이 났는데, 이것 또한 영어가 아니라 그저 일본어라고 생각하니 참을 만했다. 문법은 생각보다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아서, 수업만 꼬박 들으면 충분히 따라갈 수 있었다. 문제는 말하기 연습인데, 소심하고 겁이 많은 일본 사람들과 말문을 트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의 경우는, 동네 주민센터의 한일 문화 교류 모임에서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거기에 매주 참가하면서 일본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들은 모두 한국을 좋아했고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서, 나에게 열심히 질문을 하고 부족한 내 일본어를 고쳐주며 만남을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감이 생기며 말하는 게 쉬워졌다. 말하는 게 쉬워지니까 듣는 것도 쉬워졌다. 보통 10개월 정도 지나면 지하철에서 떠드는 여고생들의 이야기의 대부분을 알아들을 수 있고(언어적 감각이 부족한 나조차도 그랬다), 텔레비전의 예능프로를 보며 히죽히죽 거리게 된다.


일본에서 진학을 하려고 한다면, 천자 정도의 한문(고등학교 졸업자 수준)을 외우고 쓸 수 있어야 한다. 일본어 능력 시험을 위해서인데, 나같이 한문에 까막눈인 여인도 1년 정도면 가능했으니, 한자를 좀 아는 사람들은 훨씬 쉬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이가 들수록 도전하기에 유리한 외국어야 말로 일본어가 아닐까? 나는 예외였지만, 아무래도 어린 세대보다 한문에 익숙하니 말이다. 그리고 일본 한자는(중국 한자가 아닌 일본에만 쓰는 한자) 쓰기도 그리기도 어려워서, 일본 사람들조차도 발음 기호처럼 풀어쓰는 히라가나로 대체하는 경우가 태반이고, 똑똑한 스마트폰이 척척 한자를 찾아내어 주니까 아무런 문제없다. 일본어라는 언어의 정원은 조금은 지루하고 복잡한 입구만 통과하면, 그 후로는 척척 앞으로 내 식대로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곳이다. 그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tip :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를 좋아한다면, 일본어는 배우기 더 쉬워진다. 단순한 대사들을 따라 하면서 재미를 붙이고, 도쿄로 여행을 가게 되면 직접 말해본다. 말이 제법 통한다는 사실을 실감하면, 그다음부터 제대로 도전해보고 싶은 자신감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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