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담요 같은 하루

by anego emi


새해다. 새로운 한 해. 우리는 매번 ‘새로운’에 방점을 찍고, 작년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소원을 빌거나 계획을 세우곤 한다.


그런데 솔직히 365일이 지나면 매번 들이닥치는 ‘새해’라는 거창한 명분 앞에, 뭘 또 그렇게 다짐하고 마음을 추스르고, 안 하던 걸 혹은 안 되던 걸 해보겠다고 대찬 기압을 넣어야 하는 걸까? 새해는 그저 ‘0000년도’라는 꼬리표를 단 오늘의 연속일 뿐이다. 늘 하던 대로 하면 그만이다. 안 하면 안 되는 숙제처럼 새해 첫날부터 계획을 짜내지만 그 자체가 또 스트레스가 된다.


‘새해 첫날, 바지런한 후배 H는 새벽부터 일출을 보러 가는 사람들의 행렬 속에 씩씩하게 끼어들었다. 피난민처럼 떠밀리듯 산 정상에 올랐고, 잠시 후 이글이글 떠오르는 붉은 태양 앞에 헉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벅찬 마음에 마른침을 꿀꺽하고 삼키자 오랜만에 심장이 쿵쾅댔다. 잘은 모르겠지만, 새해에 내가 해야 하는 묵직한 도전을 향한 설렘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H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잘 다려진 셔츠 같은 빳빳한 신년 다이어리를 펼치지만, 딱히 써 내려갈 게 없다는 사실에 그만 머쓱해졌다.’


새해부터 작심하고 해돋이를 다녀온 H가 아침부터 내게 전화를 걸어, 숨도 안 쉬고 털어놓은 넋두리였다. 단편 소설의 도입부가 따로 없었다. “그러니까, 새해라고 해서 특별해지려고 하거나, 기대를 하면 안 된다. 우리는 지금도 각자의 인생을 위해 꾸준히 무언가를 해오고 있으니까 그거면 된다.’ H의 넋두리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경청한 후, 내가 건넨 짧은 총평이었다.


새해 첫날, 나는 지인들과 바닥이 따뜻한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커피를 마시며 뒹굴뒹굴 게으름을 피웠다. 폭신한 쿠션 하나를 껴안고, 또 하나는 반쯤 누운 등 뒤에 밀어 넣고, 테이블보만 한 무릎 담요를 허리까지 끌어올리고, 동그란 쟁반에 담긴 귤을 까먹으며 일상의 수다를 떨었다. 그 누구도 ‘새해엔 말이야’로 시작되는 결심이나 다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슬슬 나이가 무거워지는 걸 실감하면 새해는 단순하게 숫자가 바뀌는 것에 불과해진다. 그 숫자가 바뀐다고 해서 내가 달라질 거라는 특별한 기대도 없다. 기대가 없었으니 어쩌다 엎어지고 깨져도 실망하지 않는다. 또 그럴 때면, 생각지도 않았던 행운이 덤으로 굴러들어 올 수도 있다는 걸 곱씹으며 웃는다.


나는 깜빡 잠이 든 지인의 어깨 위에 무릎 담요를 덮어주며, 문득 무릎 담요 같은 오늘을 생각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필요한 만큼의 충분한 따뜻함이 있는, 나만의 요량으로 나만의 쓸모를 만들 수 있는, 남들에게 양보해도 아깝지 않은, 그 이상을 욕심부리지 않는 하루. 그런 오늘을 반복하며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살면, 성공한 사람은 못 되어도 지루하거나 심심한 사람은 되지 않을 테니까.


#tip

새해가 되면 연도와 상관없이 쓸 수 있는 만년 다이어리를 산다. 그리고 오늘 해야 할 일보다 어제 한 일을 메모하며 흐뭇해하거나 슬쩍 반성해본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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